이혜진의 말처럼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리벽 너머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스크린의 영상처럼 경주로 저 끝 쪽에서부터 경주마들이 질주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질주모습이 가까워지자 관람대의 2층과 3층, 4층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마치 축구경기장에서의 파도타기 응원처럼 물결을 이루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질주해오는 경주마들에게서도 그저 말들이 결승선을 향해 앞으로 질주해오고 있는 모습만이 보일뿐 아무런 흥분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유리벽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손영무는 관람대 한곳에서 광장 한곳에서 늘 초조한 표정으로 경주로를 바라다보며 흥분하고 절규했던, 유리벽 너머에서 존재했던 자신의 분신들을 보았다.
"경마한지 오래됐어?"
이혜진이 침묵을 깨뜨리고 물었다.
"얼마 안돼... 일년이나 됐나?"
손영무가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순간 이혜진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스쳐갔다. 손영무는 이혜진이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혜진은 실망의 빛을 낮은 목소리에 실어
"하긴. 우리 만날 때만 해도 경마 같은 거 몰랐었지?"
하고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우리라고 했나? 우리 만날 때라고? 어떻게 저렇게 쉽게 얘기 할 수 있을까? 그 시간들이 그저 우리 만날 때라고만 해버려도 좋을 대수롭지 않은 시간들이었단 말인가? 목구멍을 타고 신물이 솟아오르며 구토증을 느꼈다. 애써 긴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허탈했다.
이혜진과는, 손영무가 대학을 졸업하고 갖게 된 첫 직장인 개발투자회사의 입사동기였는데 대학학과전공도 같았고 나이도 같았기 때문에 입사동기들과 팀원들 중에서도 쉽게 가까워졌다. 내성적이고 우유부단한 손영무에 비해 이혜진은 쾌활하고 진취적인 성품이어서 직장 내에서도 이혜진이 오히려 설쳐대는 편이었고 손영무는 수습을 하는 쪽이었다. 이혜진은 그리 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세련되고 섹시한 옷맵시와 매너로 직장 내에서도 많은 남자사원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손영무는 이혜진이 내심으로 그런 은밀한 시선들을 즐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손영무로서는 그런 못마땅한 심정을 털어놓거나 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혜진이 자신을 한번도 이성으로 대접해 준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둘 사이의 관계라는 것도, 그저 직장의 한 팀원으로서 일로 공생하는 정도라거나, 회식 후에 귀가택시를 태워주는 책임을 떠맡는다거나, 직장동호회 산악회행사 때 동반등반을 한다거나, 어쩌다 휴일에 영화관람 한두 번 함께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어정쩡한 관계가 시작 된지 한 일년 쯤 지난 후부터는, 회사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막연하게나마 사내 커플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송년회파티가 있었던 날이었다. 그저 구석자리 한곳을 차지하고 혼자서 술잔을 홀짝이던 손영무와는 달리, 이혜진은 그녀의 활달한 기질답게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임원이든 중역이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셔댔고 2차와 3차에 가서는 완전히 만취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 갈 길들을 간 다음에도 손영무는 완전히 뻗어버린 이혜진을 들쳐 업고 빈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허둥댔지만 빈 택시는 고사하고 합승자리 하나를 얻어내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 할 뿐 아니라 설령 빈 자리가 보인다 한들 완전히 뻗어버린 여자를 태워줄 택시기사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이혜진을 들쳐 업은 채로 한참을 낑낑대며 걸어서 모텔네온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말의 북적대는 분위기 속에서 빈방을 얻어내는 것도 기적을 바라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몇 번째 허탕을 치고 나서 겨우 한곳의 모텔방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진맥진한 손영무는 이혜진을 내동댕이치듯 침대위로 떨쳐냈지만 이혜진은 내동댕이쳐져 온몸이 뒤틀려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손영무가 인기척에 살며시 실눈을 떴을 때, 커튼 틈사이의 창문 밖은 벌써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손영무는 온몸이 뒤틀려진 채로 침대위에 나동그라진 이혜진의 코트를 벗겨 걸고 편한 자세로 잠이 들게 해준 다음, 정작 자신은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로 침대아래 한구석에서 벽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다가 그렇게 웅크린 채 잠이 들었었나보다. 고개를 들고 침대위에 누워있을 이혜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혜진은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혜진이 깨어나 샤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영무는 잔뜩 웅크린 채 잠든 까닭에 굳어질 대로 굳어진 온몸을 두 팔을 길게 뻗어내 기지개를 하는 것으로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이혜진이 샴푸냄새와 비누냄새를 풍기며 욕실에서 나왔다. 간이의자 한곳에 앉아 무료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손영무가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이혜진이 거의 알몸인 상태로 바스타올로 머리를 닦아내며 서있는 것을 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되돌렸다. 그러나 이혜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영무의 앞을 지나쳐 화장대 앞으로 가더니 의자를 끌어당기고 요염한 자태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커튼 틈사이로 스며든 화사한 빛이 그녀의 늘씬한 나신위로 날아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