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은 손영무를 잠시 바라보더니 곁에 두었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할 말 없어?"
손영무는 대답대신 다시 습관처럼 눈만 껌벅였다. 이혜진이 오히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할 말 없어?"
이혜진이 다시 물었다. 손영무는 여전히 껌벅거리는 두 눈으로 이혜진을 멀뚱하게 바라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때 미소라니? 손영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혜진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영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혜진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유난히 그녀의 구두 뒷굽으로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가뜩이나 썰렁한 카페 안을 울렸다. 그렇게 그녀는 손영무에게서 떠나갔었다. 하긴 다가 온 적도 없었으니 떠나갔다는 표현도 적당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언제부터인가 곁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냥 곁에 있었을 뿐이므로 언젠가는 그냥 곁에 없을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한 확인절차를 치렀을 뿐이라고. 그런데도 왠지 가슴 한곳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갑자기 가슴속이 싸하더니 울컥하는 것이, 혹시 눈물이라도 나려는 걸까? 설마 내가 지금 슬퍼하려 애쓰는 건가? 손영무는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참동안이나 들고 있던 식어빠진 커피 잔을 탁자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하시고 나가셨는데요?"
손영무가 카운터에 서서 쭈빗거리며 만원짜리 한 장을 내밀어보이자 카운터 아가씨가 괜스레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손영무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내밀었던 만원짜리 지폐를 다시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카운터 아가씨도 두 사람의 만남이 오늘이 마지막인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느낌이겠지. 손영무는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즘 들어 손영무가 구석진 한곳에 쪼그려 앉아 이혜진을 기다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맥 풀린 걸음으로 혼자 나가는 모습을 보인 적이 많았던 탓에 두 사람의 오늘의 이별을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영무가 커피숍 계단을 내려와 벌써 밤 깊숙이 젖어든 거리로 나섰을 때는, 이미 이혜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날 이후부터 다시는 이혜진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손영무는 깊이 삼키고 있던 한숨을 천천히 내 쉬며 다시 눈을 떴다. 이혜진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지. 한때는 우리라는 단어로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손영무는 고개를 돌려 다시 유리벽 밖을 바라보았다. 결승선을 향해 혼신을 다해 질주해오던 말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경주가 끝난 듯 경주로는 텅 비어 있었다. 경주로 저 끝에서 경주로의 모래주로를 정비하기 위해 주로정비차가 경주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손영무는 다시 이혜진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오랜 침묵 끝에 손영무가 나직이 물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이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꼭 얘기해줘야 해? 지금 내 모습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 아냐?"
지금 모습으로 알 수 있을 거라니? 손영무는 오늘 처음으로 이혜진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 순간 일방적인 단교를 선언하고 자기 곁을 훌쩍 떠나간 후,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못했던 여자가 그냥 자기 앞에 앉아있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지금 혜진이 모습하고 경마하고 잘 연결이 안 되어서 그래."
손영무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이혜진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시선을 유리벽 밖을 향해 돌렸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하는 것 같았다. 눈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손영무는 그녀의 그늘진 표정의 옆모습을 바라본 채 두 눈을 껌벅였다.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손영무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깊은 한숨을 참아 내쉬고 있는 게 역력했다. 손영무는 다시 두 눈을 껌벅이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유리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을 아무 말 없이 주로정비차가 경주로를 오가며 주로정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혜진이 손영무를 떠난 것은
"큰돈을 벌어서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상류사회에서만 살아보고 싶어. 나 그렇게 살수 있게 해줄 수 있어?"
했던 이혜진으로서는 지극히 예정된 결정이었다. 보다 여유로움. 그 여유로움이란 결국 물질의 풍요로움이었다.
"어디 날 상류사회의 귀부인으로 만들어 줄 남자 없나?"
현실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고 장래성도 불확실해 보이는 손영무보다는, 당장이라도 풍요로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더 풍요로움을 제공해줄 수 있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 떠났던 이혜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