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베팅 안 해?"
답답해진 이혜진이 물었다. 손영무가 그제야 이혜진을 보았다.
"베팅 안할 거냐구?"
손영무는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얼마 있어?"
하고 되물었다. 이혜진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돈이 없어서 베팅 안 한거야?"
"아니 돈 있어."
"그런데?"
"그냥 물어본 거야. 돈 필요하다며?"
"그래. 필요해. 그것도 많이."
이혜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얼마 있는데?"
손영무는 그녀의 태도는 아랑곳 않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순간 이혜진은 머쓱해져
"실은 오전 경주 때 엉망으로 해서 얼마 남지 않았어. 한 이십만 원 쯤 남았나...?"
하고는 이내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영무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내가 좀 빌려줄까?"
하고 물었다. 이혜진은 대답대신 눈만 깜박인 채 손영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영무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돈 따서 갚으면 되잖아?"
하며 메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이혜진이
"자신 있어?"
하고 조심스레 묻더니
"하긴 잃으면 못 갚는 거지 뭐."
하며 이내 입을 삐죽여보였다. 손영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혜진이 오히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손영무는 가방 한곳에서 종이리본으로 허리를 묶은 돈다발하나를 꺼내 이혜진에게 건네주며
"살 수 있는 만큼 4번하고 6번으로만 사. 내가 4번하고 8번으로 살 테니까."
하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바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혜진은 얼떨결에 손영무가 건네준 돈다발을 받아 쥐고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 경주마들이 경주로로 입장하기 전이라 마권구매창구 앞은 비교적 한산해 마권을 구매하기에는 그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손영무와 이혜진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창구를 돌며 마권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이혜진이 마권구매마감시간이 될 때까지 구매한 4번과 6번의 복승식마권은 모두 80만원어치나 되었다. 이혜진은 구매한 마권과 남은 돈을 손영무에게 내밀었다.
"얼마나 샀어?"
손영무가 물었다.
"80만원어친가봐."
이혜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손영무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그녀에게서 남은 돈들만 되받아 다시 가방에 집어놓고 자신이 구매한 4번과 8번의 복승식마권들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4번과 8번이 백삼십만원어치지만 오히려 혜진이가 산 4,6번이 배당이 더 좋으니까 그게 맞길 바라야지."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혜진은 손영무가 건네준 마권들을 내밀어보이며
"이걸 왜 내가 가지고 있어?"
했다.
"혜진이거잖아?"
손영무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혜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깜박였다.
"진짜로 빌려주는 거야?"
"그래."
"그러다 꽝되면 갚아줄 돈도 없다니까?"
"할 수 없지 뭐."
손영무는 씩 웃어보였다. 이혜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영무를 바라보더니 입을 삐죽이고 쥐고 있던 마권들을 내려다보았다. 손영무는
"잃어도 괜찮아. 어차피 오전경주 때 딴 돈이니까."
하고는
"마지막 경주는 저 앞에서 지켜보는 게 훨씬 좋아."
하며 사람들 틈을 헤치고 광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혜진도 하는 수없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손영무의 뒤를 따랐다. 손영무는 광장으로 내려서자 몸을 돌리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눈짓으로 이혜진에게 관람대 위를 가리켰다. 이혜진도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관람대의 각층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경주로를 내려다보며 각자에게 남은 오늘의 마지막 행운을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