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스포츠에서 스포츠의 왕이 된 경마

현대경마가 영국의 황실을 근간으로 그 초석을 다졌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경마는 영국의 시작과 미국의 활성기를 거치면서 대륙을 뛰어넘어 현재는 오세아니아주와 아시아권에서 제2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사의 발전과 더불어 경마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각각 다른 별칭을 동반했다.
현대 경마의 기본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하던 16세기 전후에 경마를 즐기던 계층은 왕족을 중심으로 한 상위 귀족계층이었으며 상류계층의 놀이문화 형식으로 경마가 자리를 잡았던 시대였다.
이때는 경마를 보통 ‘왕들의 스포츠’(Sport of Kings)라 표현했는데, 당시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던 마필의 소유는 권력과 부의 척도로 여겨졌다. 왕과 귀족들은 서로 좋은 말을 소유하길 바랬고, 시합과 내기가 이어지면서 경마의 근간이 싹을 틔웠다.
단순히 두마리의 말이 출전하여 벌이는 정도의 시합경기 수준에서 크게 향상된 것은 없었지만, 여기에 ‘스포츠’라고 명칭을 부여해서 경마의 최초 별칭으로 부른 것은 다분히 미화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경마가 점차 조직화되고 시행체의 조직력이 형성되면서 모든 공인된 경마경기에 출전하는 말의 자격을 강화시켜 족보를 가진 말들만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였고, 참가한 말들 중 최우수 능력을 발휘한 말들만을 골라 후대생산에 쓰이도록 했다.
또 거기서 태어난 말들만 경기에 참가케하는 식으로 반복하면서 우수한 품종의 말을 생산하는 수단위주로 경마를 했기 때문에 후대인들은 특히 그 당시 경마를 강조하여, ‘혈통의 스포츠’(Blood Sport)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가 17∼18세기 경이라 볼 수 있으나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전통은 서러브렛 품종 말의 생산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몰론 근친교배에 의한 폐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빠른 말을 생산해내는데 기여한 면이 결코 작지 않다.
경마는 19∼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일반 서민대중이 경마를 즐기게 되면서 경마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자본주의 발달로 서민들의 주머니가 풍족해져 레저 및 오락추구 성향이 급격히 높아졌고, 승마투표제도(Parimutuel Betting) 및 전산기기 발달로 수많은 대중이 동시에 베팅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대규모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관람대가 갖추어졌고, 아울러 대규모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경기수단으로서의 경쟁산업이 거의 없어 경마는 탄탄대로를 달리는 성장산업으로 전성기를 꽃피웠다.
이러한 전성기에 걸맞는 별칭으로 ‘스포츠의 왕’(King of Sport)와 ‘관람 스포츠’(Spectater Sport)를 들 수 있다. 이 명칭들은 다분히 ‘관중’이나 ‘관객’중심의 개념이며 특정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수많은 대중에게 즐길 기회가 제공된 ‘대중화’를 의미하는 개념이 강하게 풍긴다.
경마의 대중화가 나은 또 하나의 단면으로 현재에 적용되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좀 독특한 별칭으로 ‘추리의 스포츠’(Cerebral Sport)란 것이 있다. 이는 베팅쪽에 비중을 둔 명칭으로 보인다.
경마에 베팅을 한다는 것은 불확실한 정보나 감정적인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를 활용하여 데이타를 분석 평가한 객관적인 결과를 바탕으로 추리의 요소를 가미하여 경마에 직접 몰입함으로써 즐기는 스타일의 경마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분히 자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냄새가 풍기는 명칭이다.
앞에서 말한 경마별칭은 경마가 어떤 개념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 당시 사회에 투영되어 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영국의 왕들을 비롯한 귀족들의 놀이나 오락형식으로 출발한 현대경마는 거기에다 더욱 심취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동기를 부여한 것이 좀 더 멋진 경기를 위해 좀 더 멋있는 경기선수인 말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우수한 말이 멋있는 경기를 창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스포츠의 중점에는 그 경기를 빛나게 하는 우수선수가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왕과 귀족들도 좀 더 멋진 경기관전을 위해 궁리하다 보니 말의 혈통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를 위한 노력을 구체화한 표현이 ‘혈통의 스포츠’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경마는 특정층이 즐기던 놀이에서 대중이 즐기는 오락으로 변모하여 경주에 중점을 두던 경마에 베팅 즉 승마투표의 비중이 높아졌고, 이러한 현상은 경마역사가 짧은 후진국일구록 심하여 전체적으로 경주 자체보다 베팅부분에 훨씬 비중이 강화되는 기현상을 불러왔다.
그러나 베팅은 어디까지나 경주에 종속된 개념으로 인식해야 경마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지 베팅을 위한 수단으로 경주를 생각한다면 굳이 덩치가 큰 말을 이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왜 경마를 관람의 스포츠니, 스포츠중의 스포츠니, 두뇌의 스포츠니 하는 명칭을 경마에 부여했을까.
그것은 말과 기수들이 펼치는 경기 그 자체가 경마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권순옥 차장대우 margo@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