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생명 하나하나를 가까이에서 다뤄야 하는 응급구조사들. 경주를 알리는 발주신호 후 우승을 향해 질주하는 경주마를 따라 쉼없이 굴러가는 구급차, 그곳에 가면 응급구조사를 만날 수 있다. 의사도 간호사도 아니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신속하고 침착하게 손을 놀리는 이들에게서 생명의 엄숙함이 느껴진다.
인공호흡, 심장마사지, 심폐소생술… 선진국에서는 일상에서 손쉽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응급처치 요령이지만 아직까지 그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사고가 발생하면 빨리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환자의 상태를 돌보는 건 오히려 뒷전이 돼버린다. 그래서 응급구조사들은 더 바쁘다.
특히나 사건 사고가 많은 경마장에서 만큼은 이들 응급구조사의 중요성이 그 어느때보다 부각되고 있는데….
경마장의 안전을 책임지고 훈련자들의 생명을 돌보는 전승철 응급구조사를 만났다.

얼마전 관리사 한명이 훈련중 어이없는 사망을 맞이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를 경주마의 성격 탓에 늘상 이곳 경마장에는 사고가 끊이질 않지만 이런 경마장에서라도 죽음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사고가 나던 날도 응급구조사와 주위에 있던 기수, 조교사, 관리사들은 마음이 급했지만 정작 응급조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오직 응급구조사 하나 뿐이었던 것.
“답답했습니다. 제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공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이뤄졌더라면 죽음에 까지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이제 응급구조사로 만 6년째 일하고 있는 전승철(30세)씨는 그날의 사고를 이렇게 털어놨다.
사고로 심장과 심폐 기능이 일시에 정지했을 땐 먼저 인공호흡을 하고 심장마사지를 해주면 뇌에 산소가 꾸준히 공급되기 때문에 뇌손상까지는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뇌는 4분간 지속적으로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기능이 마비되고 생명이 매우 위독해진다. 하지만 인공호흡이라는 간단한 처치 만으로도 이렇게 중대한 사고는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아직까지 응급처치 요령은 낯선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작은 요령이라도 어떨 땐 중요한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때도 응급구조사로 활약했던 전씨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깨어나려는 사람과 전씨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삶을 되찾게 해준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는 삶의 희열을 느낀다.
죽음과 삶을 넘다들며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다는 데서 느끼는 안도감 혹은 또 하나의 생명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두명의 응급구조사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경마장에서는 연중 5백여건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한다.
일평균 1.6건의 사고가 일어나는 셈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2주째 무사고가 이어져 기록을 깨고 있다고.
기수들을 대상으로 훈련시의 안전교육 및 사고 발생시 응급처치 요령을 교육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지 모른다. 전씨는 빠른 시일내로 관리사들에 대해서도 응급처치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경마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고는 주로 경주마에게 채이거나 훈련·경주중 낙마로 인한 외상이다.
팔, 다리 골절은 오히려 큰 부상이 아니지만 경추손상 등 목 위쪽의 부상은 응급조치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전씨는 강조한다.
한번은 홍대유 기수협회장이 훈련 중 낙마를 당해 척수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응급구조사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대로 보존한 채 신경이 손상됐는지 여부를 세밀히 체크하며 병원으로 후송, 자칫 신경기능 마비로 불구에 까지 이를 수 있었던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고 병원측으로부터 초기 단계에서의 응급처치가 훌륭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한시름 놓았단다.
경주중 낙마를 당한 기수들의 외상은 천차만별이다. 지난해 경주 중 4코너 지점에서 타 마필에 방해를 받으며 심한 부상을 당했던 박태종 기수, 무리한 욕심을 내다 낙마를 당해 손목 골절의 심한 부상을 입은 김훈 기수등… 골절된 부위의 신경이 어긋난 뼈로인해 손상받지 않도록 일부러 당기고, 때려본다는 전씨는 이 때문에 기수들로부터 싫은 소리도 많이 들어야 했다.
경마장에서 전씨가 근무하며 느끼는 어려움은 바로 사고 예방이 쉽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다. 단순히 기수나 관리사들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사고라면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지만 성격이 제각각인 경주마로 인해 모든 사고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전 예방과 단속이 어려운 것. 따라서 그럴수록 기승자나 관리자의 더욱 세심한 주의만이 강조될 뿐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전승철씨는 희망의 새천년을 맞아 어떤 소망을 가졌을까?
“구조사나 응급처치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사고는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거죠. 작은 사고라도 스스로 예방하려는 의지가 필요하고 또 사고가 났을 시에는 주변에서 신속하고 침착하게 대처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사고 발생률은 낮아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요(웃음)”
전씨는 지금도 하얀 앰뷸런스와 함께 경주로를 달리고 있다.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서….
【이희경 기자 pinklady@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