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코끝 시린 겨울이 다 지났다. 여느해 처럼 힘든 겨울을 보낸 「양지의집」이지만 이곳에도 봄이 성큼 찾아 들어 쌍둥이 형제, 태민과 태빈의 표정은 밝다.
“우리는 다 가족이에요. 남들보다 자식이 좀 많다 뿐이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오늘처럼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지나치지 못해 마침내 정신지체아 한둘을 자식처럼 키우다보니 어느새 18명으로 늘었다며 웃음짓는 성치도 원장. 정상인보다 조금은 모자라지도 주눅들지 않고 이곳 아이들이 밝게 자라주는 게 바로 그의 소박한 소망이다.
많은 도움도 필요없다. 모자라는 게 넘치는 것 보다 나으니까….
어려운 생활 속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양지의집」의 새천년 봄맞이 풍경을 담아봤다.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태민이! 태민이 어딨니∼? 얼른 나와라!”
오늘은 「양지의집」 아이들이 머리깎는 날이다. 매달 이곳을 찾아 손수 머리를 다듬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 아이들은 즐겁다. 장난도 치며… 떼쓰기도 하며… 밥 먹다 말고 머리깎아 달라며 보채는 아이들의 풍경이 정겹다.
정상인같은 지능을 지녔지만 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뇌성마비아 동규, 「양지의집」맏딸 후경이, 외형적으로는 정상같지만 시계조차 볼 줄 모르는 심술쟁이 근화, 착하지만 말을 못하는 농아 가남이, 그리고 얼마전 이곳에 온 태민·태빈 쌍둥이 형제.
이들은 모두 한가족이다. 태어날 때는 남이었지만 「양지의집」이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이면서 지금은 가족이라 불린다.
성치도 원장은 뇌성마비 장애아들이 낯설지 않다. 안양중앙병원에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면서 15년간 이들을 도왔기 때문이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만한 시간동안 그는 장애아들을 내아이처럼 대했다.
“저도 우리 네가족만 돌볼 때는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한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가 장애아들을 양자로 들여 키우는 걸 보면서 아픈 이웃도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처음엔 뇌성마비 장애아 3명을 양자로 들여 정성껏 돌봤다. 그러다 하나둘씩 아이들이 늘어났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장애아 16명 외에 민아·인주 두 명의 친자식도 있다. 장애아와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이 말을 트는 시기가 늦어지고 발육도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해 안타까운 순간도 많았다. 자신의 이기심이 아이의 장래마저 망치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책감으로 괴롭기까지 했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꿨다.
“반드시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야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픈 사람 돌볼줄 알고, 남의 것도 챙겨줄줄 아는 인격적 완성이 오히려 참교육 아닐까요?”
어려운 순간은 참 많았다. 일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쌀이 떨어졌는데 아내는 아무런 말도 않았고 민아가 아침밥을 먹지 못한채 등교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속상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고 마침내 그가 고안해 낸 것은 바로 고속도로에서의 오징어, 강냉이 판매.
평일에는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면서도 고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이런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날인가 정호익 기수가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수협회 「사랑나눔회」의 도움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일한 인연이기도 하다. “고마운 분들이에요. 이렇게 오랜기간 소리없이 도움을 주고 계시는 분들은 흔치 않거든요. 경제적인 도움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이 닿기에 여기 아이들도 모두 잘 따르는 거지요”
성원장은 요즘 대학에 강의도 나가고 있다. 동남보건대학교에서 그가 실전에서 터득한 물리치료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그의 마음씀씀이를 더 많이 닮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제 소망은 하나에요. 스무명 남짓한 우리 가족, 풍족하진 않아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 가장 낮은 자를 사랑할 수 있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희경 기자 pinklady@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