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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여배우 장화자가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하고 물었을 때 자칭 사업가인 강호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둘 만의 공간으로 이동했으면 거기에 합당하게 굴어야지 달랑 외투 하나만 벗고 의자에 착석한 채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기껏 하는 말이 “여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라니.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뭘 말하는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 참 많이도 들어봤던 거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제목으로도 나오고 노래에서도 수도 없이 나오고 오랜만에 책이나 한 줄 읽어볼까 하면 또 튀어나오는 말이 그거였다. 신문까지 요즘은 말랑말랑하게 사랑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었다. 하도 사랑의 범위가 넓어 뭐라고 들은 애기를 다 옮길 수는 없지만, 지금 장화자가 묻고 있는 건 한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 있느냐는 소리 같았다.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운 아가페적 사랑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실체도 막연하고 형체도 없는 그게 왜 궁금한지 알 수 없었다.
역시 교과서에서 배운 에로스적 사랑이라면 할 말이 좀 있었다. 그거야 말로 사랑이라는 것과 흡사한 것인데 적어도 어떤 구체적인 실감을 주는 것이었고, 결과라는 게 있어 만족스러웠나 미진했나 같은 답이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해서 그런 거라면 좀 답을 할 수 있지만 지금 장화자가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어 그만 짜증이 나려 했다. “뭔 사랑?” 자신도 모르게 이런 대답이 나오고 말았다. “하긴 묻는 내가 모자라는 여자지.” 하고 장화자는 자신이 한 질문을 철회할 태세였다. “그럼 자긴 남자를 사랑해 본 적 있어?” 강호영은 예리하게 그 질문을 돌려줌으로써 순간적으로 장화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남자를 사랑해 본 적 있냐고? 여자란 직업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인데, 그건 타고난 직업 같은 건데 그러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사랑하고 틈틈이 남자를 사랑하고 그러는 건데, 나중엔 정이 들어 정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건데 ,.. 그러다 남자라는 족속을 제대로 알고부터는 남자 하면 꼭 돈 하고 연관시켜서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돈을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걸 지금 이 인간에게 설명하면 뭐 하겠나 싶었다.
강호영의 경우는 여자를 생각할 때 사랑 이런 말은 안 떠오르고 괘락, 돈 이런 말만 주로 떠올랐다. “난 인생을 사랑해.” 장화자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와 강호영은 또 한 번 놀랐다. 모텔에서 이런 철학적인 대사를 주고받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잠자코 샤워나 하지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이게 무슨 대화법이란 말인가. 내일은 경마장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데, 예리한 지각능력을 발휘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육체적으로 긴장을 좀 풀고 욕망의 찌꺼기를 깨끗이 씻어내고 청정한 마음으로 경주마를 선택을 해야 하는데, 지금 육체적 긴장을 풀기는커녕 심적으로 괴롭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