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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은 이제 됐고
영화감독 김은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와 데이트의 한 코스로 영화관을 찾아 로맨틱 맬러물을 보고 있었다. 드디어 남녀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 감격적인 포옹을 하는 걸로 영화가 막을 내리고 있자,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몸이 비비 꼬이는 걸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장화자는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이 영화를 세계 명작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정한 사랑이 자신에게도 찾아 올 날이 있을 것을 굳게 믿으며 진한 여운을 가슴에 간직한 채 자리에서 엉덩이를 겨우 떼고 있었다.
장화자는 그 진정한 사랑이, 바로 옆의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김 감독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수상한 돈냄새를 풍기는 게 뭔가 있을 것 같기고 하고, 또 돈이 있는 남자를 좋게 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가급적 친밀감을 내비치는 걸로 오늘 밤을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영화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으므로 이 길로 어디 로맨틱한 장소를 찾아가 좀 더 영화의 잔상을 음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로맨틱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었고, 이미 저녁 내내 그 로맨틱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달이 비치는 거리를 산책도 해 봤고, 그 외양이 뉴욕이나 파리의 카페와 버금가는 카페에서 진한 커피와 함께 심심한 대화도 나눠 보았던 것이다. 영화관에선 팔이 닿는 순간이 몇 번 있었고, 그때의 뭉클한 감촉을 간직한 채 그 느낌을 연장시키고 확장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바로 모텔로 달려가 환희를 맛보는 것이 정당한 것 같았으나 함부로 덤벼들다간 산통을 깰 수가 있기에 신중하게 자제하고 있었다. 특히 복권 탄 돈이 있는 걸 이 여자가 모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차나 한 잔..." 영화관에 오기 전 차를 마셨음에도 딱히 갈 데가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놓아 줄 수도 없어 감독은 그렇게 말을 꺼내 보았다. "차요? 그러지 말고 어디 술이나 한 잔 더 해요." 의외로 장화자는 차 대신 술을 입 밖에 꺼냈다. 반가운 소리였다. 저녁에 보쌈에 소주를 마셨지만 장화자가 워낙 많이 먹는 바람에 고기를 몇 점 못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에 안주를 좀 먹으면 어떨까 싶었다. 게다가 술이라면 발걸음이 매우 가벼워지는 감독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괜찮다면 우리 집 근처에서 한 잔 하고 싶은데요. 분위기 좋은 바가 하나 있거든요. 어떠세요?"
그렇지, 위험하지. 이렇게 화려한 미모에 뇌쇄적인 몸매의 여자가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위험은 매우 커지지. 해서 감독은 그녀와 함께 제일 먼저 달려오는 택시를 잡아타게 되었다. 집 근처라면 그녀와 좀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여차하면 둘 만의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