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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관계에서도 돈이 말을 한다
복권에 당첨되었으나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40대의 영화감독 김은 블루호텔 뒤 먹자골목의 보쌈집에서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와 함께 소주 한 잔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해 보자면, 돈은 있지만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감독이 열흘 전쯤 심심하던 차에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에게 전화를 했고, 두 사람은 야심한 시간에 만나 산낙지에 소주를 마시며 그간 무고하셨는지 지금은 어떻게 사시는지 등을 서로 여쭈며 공감의 시간을 쌓아갔다. 장화자가 보기에 옛날의 그 초췌한 감독이 아니라 돈에 별 아쉬움이 없는 듯한 모습이어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하고, 이제 그녀에게 급호감을 보이고 있는 감독이 어떤 일을 제안해 올지 사뭇 기대에 차있었다. 그리하여 블루호텔에서 만날 것을 감독이 제의해 왔을 때 장화자는 뛸 듯이 기뻐하며 동네 미장원에서 얼른 머리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간 것이었다. 그런 특급 호텔을 가자면 콜이라도 불러서 가야 하건만 거기까지 뭘 타고 왔는지 묻는 놈도 없을 테고 그래봐야 주머니를 탈탈 털어 올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마음 편하게 지하철을 타고 그 뇌쇄적인 몸매와 우월한 미모로 뭇남성들의 감탄어린 시선과 여자들의 질시어린 시선을 받으며 왔던 것이다. 장화자는 배우 출신 답게 불특정다수의 시선을 평소에 즐겼는데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징그러운 시선보다는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넋을 잃고 보거나 또는 몰래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거나, 마주칠 것 같다 싶으면 재빨리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그런 순정한 남자들의 태도가 좋았다. 그리고 여자들의 질시어린 시선은 그것들이 질시할 수밖에 없는 외모이니 당연하다고 보고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이런 몸매와 미모의 장화자가, 자신이 만나는 남자가 돈이 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서민의 음식인 보쌈을 시켜 볼이 미어져라 먹고 있는 걸 감독은 매우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편견을 깨는 사람’ 같다는 소리를 하게 된 건데 앞으로 편견을 깨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더 발생할지는 아직은 모르고 있었다. 감독은 복권 탄 돈을 숨기고, 숨기려는 것보다 말을 안 하고 상황을 느긋이 만끽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요즘 실감하고 있었다. 사람이 여유가 있어 보이니 상대방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느낌도 받았는데, 이 우월한 미모의 장화자가 때때로 아첨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고 감독은 남녀관계에서도 돈이 많은 말을 한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감독은 장화자를 바라보며 오늘 돈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