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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낙지 먹는 밤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40대의 동영상 제작자, 소위 영화감독은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가 팔을 뻗어 잡아주는 바람에 최소한 뇌진탕은 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술자리까지 동행해주겠다는 미소 띤 대답을 얻어냈으니 발을 한 번 헛디딘 것치곤 그 결과가 크게 만족스런 것이었다.
“산 낙지 먹을게요.” 해산물 종합판매 식당에 들어선 그녀는 벽 메뉴판을 길게 볼 것도 없이 바로 산낙지를 택했다. 산낙지로 말하자면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워낙 인상깊게 섭취하는 바람에 전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영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이런 식당에서는 매우 잘게 썰어져 나와 어린아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소주와 맥주를 시켜 황금비율로 배합하고는 감독은 여배우와 건배를 하였다. 밤이 너무 늦어 술 한 잔은 곤란한 것처럼 말하던 장화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 잔 정도를 쭉 들이켜고는 꿈틀대며 도망가는 산낙지를 기어이 집어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게 미인의 입이건 향수냄새가 풍겨오는 어느 장소이건 산낙지 입장에서야 모든 것이 죽음의 길일 따름이었다. 물론 거의 죽은 상태지만 다시 한번 제대로 죽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남성들은 산낙지를 스테미너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 바, 심지어 산낙지에 복분자까지 곁들이는 인간들도 적지 않았다. 당장 어디 써먹을 데가 없다 하더라도 일단 먹어나 두자 이런 마음가짐이 남자들에겐 흔하다 할 수 있었다. 꼭 성적인 방향이 아니더라도 스테미너는 일상적인 활동을 좀 더 활기차게 만들 수도 있는 법이었다. 여자라고 에너지가 넘쳐서 나쁠 건 없었다. 기운이 넘치는 여자는 언제나 좀 더 많이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자심감이 있으니 남자나 타인에게 끌려가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에겐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성향은 신체적인 컨디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학설이다. 좌우지간 장화자는 산낙지를 택했고 그것을 이제 두 접시 째 섭취 중이었다. 감독이 생각하기에 산낙지를 두 접시 째 시킨 것은 혹시 어떤 복선이 깔려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우리 서로 기운을 내자’ 이런 뜻이 아닐까. 이것은 보다 긴 관계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간 장화자는 생기가 더욱 넘치고 그 자태가 이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맞은 편 남자의 숨을 막히게 하고 있었다. ‘밤은 여자를 달처럼 밝게 한다’ 감독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달처럼 농염하게도 한다’ 그런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