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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에 선행을 베푸는 여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40대의 동영상 제작자 즉 영화감독이 한때의 여배우 장화자에게 건의했으나 그녀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밤이 늦었다는 건 이유가 되지 않는데도 그러한 이유를 들어 술자리는 곤란하다고 하니 남자는 달리 방법이 있어 그만 일어나고자 했다. 아무리 눈앞의 여자가 뇌쇄적이고 사람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그런 존재라 하더라도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울며 매달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다음에 한 번 봐요.” 이런 대사를 남기고 일어서려 하자 장화자는 매우 불투명한 시선을 남자에게 던졌다. ‘도대체 이 야밤에 날 불러낸 이유가 뭐냐. 본론도 밝히지 않고 술이나 한 잔 수작을 부리다 그게 여의치 않자 일어서려는 걸 보니 정말 한심한 남자군. 날 어떻게 보는 거야. 흔해 빠진 게 감독인데 아무리 시세가 없다 하더라도 왕년에 주연까지 한 여배우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도 되는가’ 하는 울분의 빛까지 엿보였다. 그러나 남자가 일어나자 여자도 한숨을 쉬며 가방을 움켜쥐고 일어섰는데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감독이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다 그만 발을 헛디뎌 구를 뻔한 것이다. 이때 그의 뒤에서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는 손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장화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게 그때 누구였던 간에 본능적으로 붙잡았을 것인데, 어쨌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를 한 잔 하던 남자가 그만 굴러떨어져 뇌진탕이 걸릴 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팔을 아니 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화자의 도움으로, 남자는 발은 약간 삐끗거렸으나 최소한 굴러떨어지지는 않게 되었다. “아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남자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주머니에 복권 탄 돈이 많으면 뭐 하나, 뇌진탕으로 반신불구가 되면. 그러니 돈을 마음 놓고 슬 수 있게 해준 장화자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화자는 뭐 특별히 신경 쓴 건 아니고 그냥 도운 것뿐이라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 남자가 약간은 불쌍해 보인 건 사실이었다. 여자는 가끔 똑똑하고 빈틈없는 남자보단 이렇게 발을 헛디디고 뭔가 도움을 필로로 하는 남자한테 끌리기도 하는 것이다. ‘좀 돌봐야 되겠군. 또는 말동무라도 해 줘야 되겠군.’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것도 여자의 본능적인 성정에 기인하는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네.” “지금도 술 한 잔 하시고 싶으세요?” 아, 어찌 이런 일이. 좀 전까지만 해도 찬바람 돌던 그녀가 스스로 선행을 베풀고 이어서 또 선행을 베풀러 하다니? 감독은 감동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