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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목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 대축일 미사에 여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였고, 고해성사도 하지 않았다. 미사 내내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울기만 했다. 울음소리 때문에 미사는 엉망이 됐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데 기뻐하지는 않고 곡소리라니.
한 할머니 교우는 미사 도중에 “성당에 저런 암탉이 울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일침하고는 자리를 떴다. 여자의 정체를 알 리 없는 본당신부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역시 여자에게 다가가서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모든 참가자는 미사가 엉망이 되는 꼴을 관망하면서 무언가를 억지로 만들어 냈다.
미사가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며 사제관으로 가는데 주차장 입구에서 여자가 쭈뼛거리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아니, 클라라 자매.”
“메리 크리스마스, 신부님. 오랜만이네요.”
먼저 알은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변에 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걱정도 앞섰다. 미사 내내 울던 여자는 역시 사라지고 사람을 만나 반가운 팔색조만이 있었다.
“잘 지냈어요? 연락이라도 하죠.”
팔색조는 오해였다.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여자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그럽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흑흑, 흑….”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자 여자는 고개를 주억대며 받아들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도 되니까 마음 편하게 얘기해요.”
“조용한 곳 어디 없어요? 이젠 사람이 무서워요.”
“어디로든 먼저 가 있어요. 옷만 갈아입고 따라가겠습니다.”
“데이파크에서 만나요. 브라우니70에 있을게요.”
약속하자마자 여자는 손수건을 손에 쥔 채 뒤도 안 돌아보고는 총총걸음으로 앞서가더니 10m쯤 지나 베이지색 경차에 올라탔다. 대형 계약을 성사한 비즈니스맨 같았다.
사제관에서 데이파크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다. 여자와 달리 차가 없는 나는 걸어서 가야만 했다. 광교산 자락에 새로 조성된 신도시를 가로지르는 성복천은 산책하기에 좋도록 인공적으로 조성됐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누구도 춥지 않았고 슬퍼하지 않았기에 그저 따듯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 되는 날이다. 사람들이고 차고 길가로 쏟아져 나와 일 년에 단 하루뿐인 연휴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브라우니70에 들어섰다. 여자는 1층 흡연실에 있었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고 손가락으로는 스마트폰을 쿡쿡 찌르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빨리 오셨네요. 아, 게임하고 있었어요. 스트레이 해소에 이만한 게 없어요. 그때그때 풀어줘야죠.”
여자는 스마트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담배 역시 끄지 않고 대답만 했다.
“스트레이요?”
“스트레스라고 말하면 그것도 스트레스받는 거 같아서 난 스트레이라고 해요.”
대중은 유체 이탈 화법이라고 하겠지만, 기실은 추상적 개념이 도출한 기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표를 창조해 낸 대처법이다. 사물과 대상 심지어 관계와 역사까지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새로운 창조경제의 모범 일꾼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잘 살기 위해 새마을운동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산업화 시대의 노예로 살아가며 자녀들의 성교육이나 언어 예절조차 가르칠 수 없었던 우리 부모 세대의 유산을 이으려는 노력이다.
“뭐 마실래요?”
“난 우유요. 따듯한 걸로. 여기 쿠폰에 도장 찍으면 돼요.”
당연하다는 듯 여자는 현금 대신 쿠폰을 내밀었다. 할인 쿠폰이 아니라 마일리지 쿠폰이었다. 우유 한 잔에 자그마치 3천 원이나 했다. 1ℓ들이 우유보다 비쌌다. 커피값은 또 왜 그리 비싼 건지. 사제가 얼마나 번다고 빈대를 붙는 건지, 지난번에도 술값을 다 치르게 해놓고선 왜 또 저러는지 모르겠다.
좋은 동네에 살면서, 얼핏 보기에 ‘부르주아’ 소리도 들을 법한데 남에게 돈 쓰는 데에는 인색하다. 한때 유행했던 된장녀와 조우한 느낌이다. 물론 사제는 현대사회가 배설한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나는 고리타분하지 않다. 남자가 계산하는 게 매너인 것도 안다. 하지만 몇 달 만에 찾아와서 자리를 만들었으면 차 한 잔 사는 게 예의 아니던가. 남자들이 선진화되기를 바라면 더치페이는 기본 아닌가. 나를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남자로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계산대 앞에서 기다렸다가 주문한 우유와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고 흡연실로 향했다. 여자는 여전히 게임에 몰두 중이었다. 우유와 마일리지 쿠폰을 코앞에 들이밀자 그제야 게임을 마무리했다.
“잘 마실게요. 추웠는데 잘됐다.”
잔을 든 여자는 두꺼운 입술을 쭉 내밀고는 고개를 돌려가며 후후 불었다. 그다지 뜨겁지 않을 텐데 조심성이 많은 건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몸에 새겨진 습관인지 궁금했다.
“앗, 뜨거워.”
“조심해요.”
“원래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요.”
잔을 내려놓은 여자는 다리를 꼬더니 자기 이야기부터 꺼냈다. 상대 안부에 대해서는 일절 궁금한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고해실 나무 덧문 안에 갇혀 있는 신부는 화자가 아니라 청자여야만 하지 않던가. 여자는 자기 역할에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이번 고해는 조금 달랐다. 사랑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말은 사라졌다. 대신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질렸다는 말이 등장했다. 말투도 어딘가 차분해졌다. 속어나 외래어를 남용하지 않았다. 남자의 영향 때문이리라. 어찌 됐든 여자의 고해는 또 시작됐다.
“어제 영민이가 전남편이랑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만난 지 200일이 얼마 전이었는데 그때부터 자꾸 전남편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했었어요. 하지 말라고 말리고 화를 냈는데도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전남편에게 연락해서는 사귀고 있는 남잔데 나와 왜 이혼했는지 이유를 물었대요.
엄마한테는 정리했다고, 그간 속이고 만나서 죄송하다고 했고. 그러면서 어릴 때 내게 못 한 게 많다고 오냐오냐 키우지 마라, 사랑하는 만큼 혼도 내고 관심을 가져라, 내 앞날이 걱정된다, 이딴 말을 했다는 거예요. 내가 어릴 때 버림받은 상처가 지금까지 남아 만나는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고 다닌다나? 진정으로 내 앞날을 걱정해서 그런 거래요. 상처 안고 평생 살까 봐 걱정된다고. 나랑 찍은 사진들도 톡으로 보내고…. 그러면서 저한테는 멍청한 년이 멍청한 년을 낳는다고 막말을 하는 거 있죠. 만나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너무 지치고 힘들다고, 좀 쉬겠다고 당분간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더니 결국엔 또 상황을 이렇게 만들더라고요. 아주 피를 말렸어요. 어제는 잠도 못 자서 수면제 먹고 잠들 정도였다니까요. 앞가림도 못하는 지 까짓 게 뭐라고. 뭘 그리 가르치고 싶은 건지.”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셨어요?”
“몰래 만나고 다닌 거 다 알고 계셨대요. 그런 거 보면 우리 엄마도 참 대단해. 영민이한테는 지난 것에 연연하지 말고 쿨하게 정리하라고 했고. 앞날이 창창하니까 깨끗하게 잊으래요.”
“전남편은?”
“몰라요. 그 사람이랑 연락 잘 안 해요. 그놈도 똑같지 뭐.”
두 달 사이에 전남편과의 사이도 틀어진 게 분명했다. 지난번에는 분명 성숙한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이별을 들먹이지 않았는가.
“티격태격해도 잘 만나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두 사람 의외로 잘 어울렸어요.”
“사실 200일 때 프러포즈를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나도 눈치를 줬죠. 프러포즈하면 계약 동거라도 해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했다고 해서 그러려나 보다 했는데 웬일이래, 프러포즈는커녕 편지를 썼는데 이별을 암시하는 시를 쓴 거 있죠. ‘즐거운 이별’이라나. 어이가 없어서….”
“고백 대신 이별을 하자고 했다?”
“그렇다니까요. 뭐 최근 두 달 동안 늘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는 살았어요. 한 번 더 그러면 진짜 헤어진다고 협박해도 술만 마시면 헤어지자고 수없이 말하고, 술 깨면 잘못했다 그러고. 질리고 겁도 났죠. 동거라도 하면 두들겨 맞고 사는 여자가 될까 봐.”
“동거까지 생각한 사이라면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신중했죠. 난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걔는 또 건너올 수 없는 강을 또 건너간 짓을 한 거예요.”
루비콘강을 건넌다는 상용 문구를 모르면 어떤가. 하지만 건너올 수 없는 강이란 없다. 제아무리 비유나 관용적 표현을 용납한다 해도 평소 쓰는 어법에 주목하면 답은 의외로 쉽게 도출된다. 말투, 표현 능력의 한계는 뇌세포 숫자와 아이큐, 감성 지수를 드러낼 뿐이다. 물론 높은 아이큐는 자폐를 부르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지금 기분은 어떻습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피곤하기는 한데…. 뭐 그냥 그래요. 피가 마르는 공포심에 휩싸였었으니까 빨리 잊어야죠.”
고해를 듣다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여자에게는 이런 대화를 나눌 가족도 친구도 없는 것일까. 주변 가족과 친구들은 여자를 왜 혼자 내버려둔 걸까. 여자들만의 수다를 할 친구는 왜 없는 걸까. 남자들과 일대일로 깊고 짧게 만나다가 끝내고 사라지고 말았기에, 남자들에게 여자와 수다를 요구했기에 그런 건 아닐까. 온갖 한탄과 과거를 듣다가 지치게 하고 다시 새로운 남자를 찾는 과정을 반복한 건 아닐까. 남자에게서 아빠를, 남편을 찾고 있는 오류를 모르는 걸까.
일대일로 고용된 상담자가 된 기분이다. 무료로 아니 술과 커피까지 사주며 고해를 들어주기에 그 맛에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이런 상담자는 성당과 교회, 절간에서도 이제는 찾기 힘들 것이다.
대화 내내 여자는 따듯한 우유가 몸을 이완하고 잠을 부른다는 사실을 아는 듯 그러나 그 우유를 만들기 위한 온갖 과정과 수고는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깔짝깔짝 마셔댔다.
“안 만나기로 확실히 결정했습니까?”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있는데 자꾸 생각은 나요. 질렸지만 사람 정을 쉽게 뗄 수는 없잖아요. 걔도 벌을 좀 받아야죠. 피 마르는 고통이 뭔지 똑같이 겪어봐야 정신 차려요. 이참에 나도 지친 만큼 휴식도 하고.”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영민이 걔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거죠. 운명인지 아닌지 지켜보고 싶어요.”
‘지켜본다’라는 건 신적이거나 부모 또는 선생처럼 주어진 권위가 허락될 때에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여자는 스스로 남자의 선생이 되려는 걸까. 운명을 지켜보며 하느님의 선생이 되려는 걸까. 초절대적인 갑의 존재를 자처하는 여자 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위에 서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위뿐만이 아니다. 옆에도 아래에도 곁에도 밑에도 없다. 그저 홀로, 혼자, 자족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과거 상처가 지금을 지배해 현재가 안 보이기에 막무가내일 수밖에 없다. 상처를 감쌀 수 있는 것, 잠시 잊게라도 해주는 건 돈이다. 그래서 위력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한 참된 사람은 더 위대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자기 자아의 층별 구조에 대해서 여자 스스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고립이란 신 존재의 비공유적 속성이다. 그 상황이 지속되면 악이든 선이든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곧 직면한다. 나 역시 종교적 신념으로 독처하는 신분이지만, 혼자인 여자는 위험하다. 혼자 사는 남자는 홀아비 냄새가 나지만 혼자인 여자는 홀아비든 유부남이든 그들의 체취를 수집한다. 혼자 살 수밖에 없는 여자는 색깔 없는 그러나 온갖 냄새를 풍기는 존재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운명 앞에 순응하지 않는 여자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듯싶다. 편하게 생각하자. 화제를 돌리자.
“아 참, 차 새로 뽑았죠?”
“보셨구나. 새 차는 아니고 중고예요. 산 지 보름 정도 됐어요. 걔가 맨날 나 태워주고 바래다주고 하는 게 얼마나 부담되던지 후딱 샀어요. 난 빚지고는 못 살아요. 나중에 또 딴말할까 봐 무섭고.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차 살 때도 영민이가 자기 거 아니라고 얼마나 성의 없이 굴던지 그때도 질렸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인천 간석동에 있는 중고차 딜러한테 갔는데 내 말은 무시하고 그 사람 형편과 편의만 봐주는 거예요. 엄연히 돈을 내는 건 고객인 난데. 종일 차 몇 대를 보든 말든, 맘에 안 들면 안 사도 되지 왜 지가 딜러 눈치를 보느냔 말이죠. 억지로 떠밀려서 샀다니까요.”
“참 많은 일이 있었군요. 힘들었겠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안 왔나 봐요. 저는 많이 기다렸습니다.”
“신부님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사실 영민이 집 근처에 있는 인덕원 성당엘 다녔어요. 바람난 중년들과 경마꾼들의 본토라는 그 더러운 동네로 말이죠. 연말이라 일도 바쁘고, 일 마치면 만날 시간도 부족해서 그쪽으로 다녔어요. 마지막까지 정신 차리기를 기대하면서 성당에서 세례도 받고 공부도 하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말도 안 듣고…. 암튼 지 하고 싶은 대로 고집만 피워서 정도 떨어졌죠. 내 말을 이해를 못 할뿐더러 그럴 생각도 없는 인간이에요. 지는 할 거 다 하고 살면서 나더러는 경마장에 혼자 가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린다, 방석집에 가면 0지를 찢어버린다고 그러고. 대체 나를 뭐로 보고. 왜 나는 하고 싶은 하고 살면 안 된다는 건지. 그런 거 소유욕 아닌가요? 남자라면 이제 질려요.”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맞아요. 올해 있었던 안 좋은 일들 싹 잊고 내년에 새 출발 하려고요. 이혼한 것도 잊고 전 직장에서 뒤통수 맞은 것도 잊고 잠깐 스쳐 간 인연도 잊는 거죠. 내년엔 분명 좋은 일, 안정된 사람을 만나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제까지 내 인생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수는 없잖아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입으로는 은총을 빌었지만, 여자의 말이 헛되다는 걸 직감했다. 스스로 변하지 않는데 환경이 달라질 수 없고, 노력하지 않는데 거저 주어지는 건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 아니던가. 허영의 시장에서 넋 빠진 남자들이 걸리기를 마냥 기다리는, 싱싱한 육체를 파는 장사치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말 놓기로 했잖아요? 어디 가서 술 한잔 하며 더 깊은 얘기 나누고 싶은데 시간 괜찮죠?”
“아, 그게… 오늘은 어렵습니다. 저녁에 본당신부님과 수녀님들과 기도회가 있어요.”
나는 잠시 시계를 보는 척하며 얼른 둘러댔다. 사실 시몬이 생각나 두려웠다. 술을 마시고 모텔을 가자고 꼬실 게 분명하다. 그다음에는 거칠 것 없는 날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았다. 희생양이 되기도, 입방아에도 오르기 싫다. 거절 의사를 보이자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거절에 대한 역습을 나름대로 시도했다.
“내 앞에서는 착한 척 안 해도 돼요. 난 스펙트럼 넓은 여자니까. 무슨 말인지 알죠? 신부님도 자세히 보면 낮져밤이야. 그런 거 보면 영민이랑 다이다이라니까. 뒤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신부님도 나중에 기리까이하는 거 아네요?”
“낮져밤이가 뭐죠?”
처음 듣는 말이다. 꿍꿍이를 만드는 건 여자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방어를 위한 생존 전략일 뿐이다.
“낮에는 착한 척, 약한 척하고 밤에는 짐승으로 돌변해 상대를 리드한다는 거죠. 흐흐.”
예의 그 비웃음은 없었지만,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야릇하고도 음탕한 미소를 여자는 지어 보였다.
“사실 영민이가 그랬거든요. 한껏 발정 난 씨수말 같았죠. 지치지도 않아요. 섹시한 맛은 없지만 거친 게 매력적인 간지 스타일. 근데 그런 거 쉽게 나가리돼요. 씨수말처럼 굴어도 결국 여자한테는 시정마로 남는다니까요.”
“참 비유가 생생합니다.”
멋쩍어진 나는 여자를 칭찬하고는 커피를 마셔야 했다.
“제가 요즘 공부에 몰입하고 있거든요. 저 방통대 다닌다고 말했었죠? 마지막 학기도 잘 마무리했어요. 다음 주부터 계절 학기 두 과목만 이수하면 졸업이에요. 배우는 건 좋은 거잖아요. 영민이 도움 없이도 혼자 3.0점을 받았다니까요. 여태 2.0점을 넘은 적 없었는데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아, 그러고 보니 3.0점 넘으면 샤넬백 사준다고 약속했었는데 그거 아까워서 나랑 헤어지자고 했나? 갑자기 생각이 나네. 쌍놈의 새끼.”
“설마 그랬을까요.”
“남자는 다 똑같아요. 제가 후배들 연애 상담전문가거든요. 말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보면 알아요. 지갑을 얼마나 여는지가 중요한 덕목이죠. 덕목이라는 말 알아요? 지난 학기 철학의 이해 시간에 배운 건데 전통적이면서도 섹시한 단어예요.”
“아, 알죠….”
“신부님도 공부 좀 했나 보네요. 그러면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는 알아요?”
덕목이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정에서 습관화되도록 배우고, 개념은 중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 아니던가. 충, 효, 인, 의라는 덕목이 결핍된 여자는 추상적 개념에도 섹시함을 느끼는 걸까. 집에서 학교에서 무얼 배웠던 걸까. 구사하는 단어처럼 참으로 난해한, 알 수 없는 존재다. 현재를 살면서 오랜 과거까지도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을 타고난 여자다.
철학을 전공한, 식자 같은 남자를 만난 영향은 아니다. 테스트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이제 막 습득한 재미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살짝 덧붙여 자랑도 하고 싶은 심정일 게다. 모두가 다 아는 것을 어찌어찌해서 이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은 모른 채. 어쩌면 그 사실을 알아도 인정하기도 싫은 건지 모른다. 그래도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나을 것이다. 이제 막 동굴 밖을 보고 온 죄수에게 진리는 여전히 어렵고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까. 이데아를 본 것으로 끝이 아니라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설파하는 실천이 있어야 진리를 아는 것이니까.
“대충은 아는데 다 까먹었습니다.”
“에이, 그런 것도 몰라요? 전 이번에 공부하면서 동굴의 비유가 참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계절 학기 때 동서양의 고전이랑 현대사회의 문제 과목을 신청했어요.”
“어렵지 않을까요? 단기간에 다 배우기는 어려울 텐데.”
“족보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계절 학기니까 리포트가 없어서 다행이죠. 사실 올해 1, 2학기 모든 과목 리포트를 영민이가 대신 써줬어요. 난 벼락치기에는 일가견이 있고요.”
목이 탔는지 아니면 이제는 식어서 괜찮다는 건지 여자는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쭉 들이켰다. 먹고 마시는 것도 벼락치기였다.
“인제 그만 가보죠.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에 또 얘기합시다.”
“아쉽네…. 알았어요. 신부님은 내 말도 잘 들어주고 매너가 있어서 좋아요. 우리 톡 말고 텔레그램으로 이야기해요. 나도 이제 성당에 빠지지 않고 갈게요. 앞으로도 변함없는 친구로 남아줄 거죠?”
“그렇게 하지요.”
여자는 성당 앞 성복고등학교까지 나를 바래다줬다. 괜찮다고 만류해도 끝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우기는 탓에 감시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성동마을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여자는 “저기가 우리 집”이라며 묻지도 않은 곳을 가리켰다. 내릴 때는 일요일에 보자며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여자는 마치 업무 보고를 하듯 수시로 텔레그램 메시지를 남기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샤워를 막 끝낸 듯 젖은 머리를 한 얼굴 사진도 있었다. 창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피아르하는 청년 구직자이자 화상 채팅에서 노골적으로 남자를 꼬드기는 사기 캐릭터 같다고나 할까.
계몽된, 착한 여자는 온라인에 없다. 채팅창에도 경마장에도 카지노에도 없다. 가관인 것은 꼭 자정이 넘은 시각이면 술이나 한잔 하자고 계속 불러냈다는 점이다. 메시지를 못 본 척하고 다음 날 아침에야 연락하면 여자는 화가 난 듯, 똑같이 해주겠다는 듯, 너도 기다려보라 하고 주문을 걸듯 정오가 되어서야 이제 일어났다며 또 그날 일과를 주절주절 읊어댔다. 보이지 않는 데도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다행히 성당은 빠지지 않고 나왔다. 하지만 더는 고해성사를 하지도, 영성체를 받지도 않았다. 성탄 대축일 미사를 장례 미사로 만들었던 탓에 대부분 교우는 여자를 멀리했다. 정말이지 성스러운 곳에 몸 파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듯 대놓고 혐오스러워하는 어른들도 있었고, 안면이 있는 청년들은 뒤에서 수군거리며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런 점이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나 역시 알은체할 수 없었다. 처신을 잘 못 해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다는 것보다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사제로 기억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자라도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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