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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올라온 뒤 아버지는 사업을 했고, 어머니는 보험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강남에서 살자고 해서 이사를 했지만, 형편은 더 어려워졌죠.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은 어린 미아를 친할머니와 고모들에게 맡겼습니다. 십여 년이 지나 경제적 문제로 결국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머니를 따라 암사동에서 살면서 의지할 남자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도는 편력이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순수하게 아버지의 손길, 목소리, 그 빈자리가 그리워 남자를 찾았습니다. 순수하다는 의미는, 사랑의 결핍을 알기에 사랑의 필요를 저절로 자각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부모의 방관으로 스무 살 때까지 아토피와 무좀을 앓았던 아이를 저명한 피부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해 준 남자였습니다. 첫사랑이었죠. 남자가 고마웠던 아이는 빨리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고 싶었지만, 결국 버림받았습니다. 부모만이 채울 수 있는 외로움, 그 끝도 없는 공허함을 어린 남자가 감당할 수 없었던 거죠. 최후의 선택으로 아이까지 낳으려고 했지만, 결국 남자의 부모로부터 낙태 수술을 강요받았습니다.
좌절과 분노까지 흡수한 아이는 다른 영혼을 친구로 불러들입니다. 컴컴한 방에 고립돼 막연한 대상에게 대화를 겁니다. 마치 웹이나 채팅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의 남자를 찾는 모습과 닮았죠. 요즘 세대 여자아이들이 사회의 끝을 보는 곳이 바로 채팅입니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똘똘 뭉쳤으나 겁이 많고 소심한 아이들은 온라인에 집착합니다. 천사가 자기 아픔을 위로해 주기를 바라지만 실상 그 대화 상대는 악마였습니다.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이 여자를 꼬드기는 목적 하나만 있는 것처럼 달콤한 말로 찾아온 그 악령은 얼마 안 가서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이 전체를 지배합니다. 나쁜 남자뿐 아니라 타락한 영계 내 존재에게도 속아 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곧 자신에게 적당하고 편하다는 걸 인정합니다. 비위를 맞춰 주고 하나 됨을 느끼게 해주니 자기 영혼이 좀먹혀도 개의치 않습니다. 게으름을 정당화하고 더러운 말을 내뱉게 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 섹시하다고 주문을 겁니다. 자주 가위에 눌릴 정도로 영혼 전체가 두려움에 지배당했지만, 곧 견딜 만해집니다. 서로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착취당하는 건 아이 혼자입니다. 냉소와 적개심, 낮은 지위의 사람을 깔보는 교만,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반항심이 성인 여자에게 일상화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여자들의 얼굴은 바뀌었습니다. 후덕하고 푸근한 전통적인 형상을 깎아 내 박덕하고 날카로운 형상을 창조했습니다. 오랜 세월, 성을 착취당하고 노예처럼 살아왔던 한이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폭발했습니다. 생존 법칙에 따라 임계치에 도달한 존재는 공격적으로 진화해 얼굴빛에 투영됩니다. 살기 가득한 전투사의 얼굴입니다. 보부아르의 영향이나 여성 상위라는 사회 흐름 때문이 아니라 노동 때문입니다. 일 때문에 바쁜 아버지의 공백, 맞벌이 부모의 예고된 이별로 여린 그네들은 성장하며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가정사를 핑계로 방종을 누립니다. 역사와 사회와 남자를 향한 적개심이 얼굴에 남아 면접을 보면 쉽사리 떨어지기 일쑤이니 스펙을 갖춰도 기대했던 조직이나 사회에 진입하기 힘듭니다. 돈이 필요해 몸을 망가뜨리고 시간만 낭비하는 루저로 전락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씻는 것도 귀찮아합니다. 일상을 숨기고 감정을 숨깁니다. 자기 자신까지도 속입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심지어 신의 존재조차 말입니다.
악령은 이런 약점을 놓치지 않고 이용합니다. 여자의 약점을 악용해 스스로 하향 직선을 그리며 나락으로 떨어지도록 부추깁니다. 육체는 성장하고 있지만, 구덩이를 파고 또 파는 일에 몰두하며 영혼을 잠식시킵니다. 미아의 경우, 사진을 찍는 직업 때문에 주변에는 언제든 새로운 남자들이, 한 번 몸을 섞고 다시는 안 볼 수 있는 남자들이 넘쳐 납니다. 이중 언어를 내세우고 온갖 표정으로 남자들과 비즈니스를 합니다. 일본 출장을 가서는 이탈리아 남자와 부산 출장을 가서는 광고를 준 유부남과 절친한 후배와는 술에 취해 관계합니다. 창녀도 아니면서 남자를 직업적으로 만나기에 남자가 떨어지면 언제든 갈아탈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쉬운 길은 언제나 편하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한 방향으로만 가야 하는데, 다양한 남자가 주는 이런저런 사랑의 양태가 즐거워서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저 남자는 어떻게 사는지, 무얼 먹고 어떻게 싸는지, 잠은 어떻게 자는지 궁금해서 더불어 먹고 함께 자고 같이 쌉니다.
뇌가 섹시하다든지, 날남자라든지, 저음의 목소리라든지 하는 특징을 잡아내고 남자를 칭찬한 뒤 마법을 걸어 남자에게 빠져듭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곧 그 점을 비난하고 탈출합니다. 이제는 육체가 섹시한 남자, 고급지고 다정한 남자, 고음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남자가 좋아졌다는 식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도 있지만, 뭐든 쉽게 싫증 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쿨렐레, 수영, 헬스, 검도, 승마, 중국어, 소묘 등 다양한 취미와 직업군에 속한 남자를 돌아가며 만나 순간의 호기심만 채우기도 하죠.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리가 있든 말든 사랑 없이 자란 걸 자신도 잘 아는 여자는 상처를 지우고 덧씌우고자 수많은 남자를 거쳤지만,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자존감까지 상실했습니다. 입으로는 남자로부터 상처받지 않았다고, 스스로 상처를 낸 거라고 되뇌지만, 그 역시 자기기만입니다. 이 남자에게 받은 상처를 저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갖 자국을 남기고는 떠나고를 반복합니다. 자기 영혼이 파탄 난 책임은 악령에게 그리고 그렇게 내버려둔 자신에게 있지만, 만만하고 자기 육체를 범한 남자에게 묻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이 있을 거라는 착각 속에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서지만, 돈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직면한 남자는 그런 여자를 쉽게 알아보고 거부합니다. 사랑은 현실이지만, 돈은 아니라는 사실을 악한 존재는 여자에게만 숨겨 왔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여전하지만, 이제는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일상이 됐습니다. 돈도 더 잘 벌게 됐고 더는 남자를 믿지 않고도, 사랑하지 않고도 별별 성관계를 할 수 있는 풍토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결국은 여자만이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면서 피해의식이 집단적으로 퍼지게 됐고, 자기 교만의 허상은 감춘 채 본래의 여성성을 회복시키라고, 존중하라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의식주를 소비하는 주체는 남녀가 아니라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남자는, 배고플 때 먹는 간식거리이자 외로울 때 찾으면 언제든 달려들어야 하는 애완견이고 집 안 청소와 살림을 도맡아 하는 가정부로 전락했습니다. 자기 내면에 들어앉은 악령의 남성성을 어쩌지 못하고 남자를 따먹는 수집가, 남자 이식증을 자처하게 된 거죠. 먹는 즐거움만, 받아들이는 즐거움만이 아이를 유쾌하게 합니다. 아이의 행동상 특징 중 하나가 잠시의 배고픔을 못 참고 입에 뭐라도 넣어야 한다는 건데 그 찰나의 순간, 입맛에 맞는 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탓에 선지며 청국장이며 오소리며 생간을 즐겨 먹는 구식 입맛을 가졌지만, 행동에는 영악하고 속물스런 투정이 배었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지 않는 유력한 증거죠. 그런 상황에서도 골라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니 모든 일을 제쳐 놓고 간식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아이에게 새로 출발한다는 의미, 전 남자에게 기다리라는 말은 또 다른 남자를 찾겠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등해야만 하는 남자가 자기를 거부하는 건, 동침까지 해주겠다는데도 쳐다보지도 않는 건 모독일 뿐입니다. 세상에 같은 부류, 개체는 자기 하나뿐이라고 절대적으로 믿기에 다른 여자와 동일시하거나 눈길이라도 주면 꼭지가 돌아버립니다. 부모 애정의 결핍을 남자와의 에로스로 대치해 주목받고 싶은 일종의 연예인병이지요. 이용하기도 전에 이용당한다 싶으면 참지를 못합니다. 실제 남자들을 이용하면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정당하다고, 그게 자연 이치라고 주장합니다.
남자를 화나게 하는 재주를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데다가 그 기술을 갈고닦은 여자이기에 남자를 괴롭히고 지치게 해 봅니다. 테스트이기도 하죠. 다양한 남자들의 흔적이 여자의 말과 행동에 묻어 있어 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언제 정체가 발각될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여자는 여행 계획이든 연애 방식이든 똑같이 대하고 말하는 것으로 면피하려 합니다. 과거 만났던 남자의 말이나 남자에게 못했던 행동을 다음 남자에게 적용하기를 반복합니다. 싸구려 연애에 익숙해지는 거죠. 남자가 화를 못 참고 비웃거나 버리려거나 ‘너 같은 X 많이 봤다’, ‘넌 어떤 부류일까’, ‘청순한 여우 같다’고 말이라도 하면 좌절해 도망칩니다. 방과 화장실 청소부터 냉장고 정리, 옷 개는 일 등 일상은 정리하려 들지 않으면서 남자 정리는 신속하게 서두릅니다. 편하게 사람을 만나고 즐기다가 식상해지고 몸이 망가진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끝냅니다. 자신을 꼼짝달싹 못 하게 휘어잡을 수 있는 강한 남자를 원하면서도 자기주장을 못 하게 하거나 구속하거나 자유를 속박하려 들면 변심의 근거로 삼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든 떠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는 이미 다른 영혼과의 고유하고 비밀스러운 접촉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별한 이유로 남자 탓을 합니다. 엄마에게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상상 속 결과를 통보합니다. 회사 중역이 엉터리로 보고해 아랫사람을 흠집 내듯 말입니다. 자신도 남자 복이 없다고 엄마와 동일시하며 애정을 갈구합니다. 한평생 남편 그늘에서 안락함을 못 누리고 고생만 했으면서도 부정하고 잘못된 일과는 거리가 먼 어머니, 항상 베풀기만 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이혼한 어머니, 남자에게 기십 번 똑같이 당해 그 딸에게 피해 의식을 대물림한 어머니도 ‘그놈을 갈아먹어 버리겠다’며 한몫 거듭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 그게 그 아이에게 남은 유일한 존재 이유입니다. 그래야만 숨 쉴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시간이 지나 후회합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했고, 별별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 자신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라는 걸 아직 살아 있는 양심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내면의 다른 영혼으로부터 해방하게 시킬 왕자님이 언젠가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찾아오면 노예 다루듯 복종만을 요구하는 일을 반복하고, 걷어찬 걸 후회하고 또 다른 왕자님을 기다립니다. 자기 이름으로 세상을 즐기고 싶은데 근본 원인에 직면하는 대신 온갖 이벤트와 자극적인 관계로 치장하다가 상처만 받고 마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문제는 본성 때문에 더 강하고 자극적인 남자를 원해 자기만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다가 채워지지 않으면 배신에 치를 떨고, 종착에는 혼자 살며 술과 몸을 파는 인생으로 전락한다는 겁니다.
그나마 괜찮았던 남자에게는 실망하기 전에 떠나 주는 미덕은 남겼습니다.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이미지 보존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죠. 실망시킬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남자에게 과분하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별에도 최선을 다했다고 거짓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누군가를 편하게 만나고 몸을 주고받고 자발적 이별을 즐기다가 결국 이혼도 어렵게 느끼지 않는 데까지 이릅니다.
오늘날 미혼 남자들은 여성성을 떠안게 되면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여자아이를 다시 만났을 때 피합니다. 알은체조차 하지 않죠. 살을 섞으면서 여자 내면에 있는 그 존재를 봤고, 무서웠던 겁니다. 그런 여자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자라고, 심지어 인간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무서운 존재, 두렵고 떨리는 존재에 휩싸인 걸 아이는 모릅니다. 악마 연출가로부터 조종당하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위장하고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의 몸짓과 말투, 눈빛 하나에 관중들 특히 남자는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척하는 거죠. 하지만 여자는 순진한 척하는 게 좋은 남자, 제대로 된 남자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해 다시 연극합니다. 서로 속이다 보면 에로스조차 꽃 피우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나이를 먹으며 육체도 정신도 더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입니다. 온갖 상황, 새로운 환경,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르게 생각할 뿐입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면, 어린아이가 그보다 더 잘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 많은 아이일 뿐입니다. 영혼의 성장 결과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익숙함, 경제적 능력이라는 핑계로 악령은 영혼의 성장을 방해합니다. 악에는 새로운 내일, 희망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악마도 지옥불은 싫어합니다. 그곳이 자기 거처이자 삶의 터전이기에 그저 즐길 뿐입니다. 저는 미아를 잠식하고 있는 악령이 아이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그 영혼을 향해 기투한 죄밖에 없습니다.”
“잠깐, 이야기 자체가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들은 것과 본 클라라 자매와 많이 다릅니다. 자매를 왜곡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무슨 진실공방도 아니고…. 이야기가 늘어지면 진부하고 재미없어집니다. 궁금한 것부터 하나씩 차례로 제가 묻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러는 편이 생각을 정리하고, 정확히 말씀드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답하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묘하고도 야릇한 비웃음과 대조되는 눈빛은 여전했다. 내적으로는 연민으로 가득 차 외로움을 쏟아 냈고, 외적으로는 소통을 부르는 눈빛이었다. 그런 남자의 내면에 진심 아닌 거짓이 자리할 곳은 없어 보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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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