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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동정하는 게 아닙니다.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을 해줬습니다. 좋은 친구라면서 말이죠. 세상살이 힘들어도 순수함은 잃지 말자고 했던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 친구가 힘든 상황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자신을 순진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과거의 일들, 쉽게 감당할 수 없는 현재 상황들 때문에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저 또한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에 말하지 않아도 알았습니다. 서로 가장 힘든 시간에 만나게 된 이유를 처음에는 몰랐지만, 만날수록 너무나 닮은 영혼이 조우했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닮았기에, 서로를 잘 알기에 치유할 수 있다는 것도요.”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피하는 게 상식적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시기한, 차가운 마음의 죄를 저지른 건 아닙니까.”
“이혼한 것도 이미 마음을 주고 난 뒤에 알았고, 힘든 상황에서 관계 발전이 어렵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홍콩으로 여행을 다녀온다고, 가기 전날 꼭 봐야 한다며 경마장으로 찾아왔습니다. 작년 5월 25일, 주일이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하늘거리는 파란 민무늬 긴치마를 입었고 너덜거리는 분홍색 가방을 메고 오래돼 낡은 우산을 든 모습이 소탈해 보였습니다. 저를 보면서 살짝 웃었는데 천사가 구원하러 온 신호라고 직감했습니다. 천사는 저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요구했습니다. 호기심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겪어내야 하는, 당위적인 의무였습니다. 그 점이 운명을 더욱 확신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한 점이 있었습니다. 상처가 보였고 그 존재의 것이 아닌 악한 기운도 느껴졌습니다. 한때 천사들의 대표였던 루시퍼가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의 모습을 봤다고 할까요. 잔을 거부하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습니다. 나이를 먹고 사회 경험이 많아지며 인맥을 쌓고 이런저런 여자들을 만나다 보면 공통점이 그만큼 더 생기기 마련이라고도 말입니다. 운명이나 필연은커녕 인연조차 아니라고 부인했죠.
서로 더 힘들기 전에 지금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이렇게 사는 게 내 삶이라는 걸 보여 주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미아는 계속 연락을 했습니다. 첫 만남이 편했고 좋았다면서,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죠. 홍콩에 다녀온 후로부터 본격적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집 앞 커피숍에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불렀습니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외로웠던 30대 남녀가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을 했지요. 최근 직장을 그만둔 것부터 전남편과 만났던 남자에 관한 것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 들어주고 받아줬습니다. 연애 초기라서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 사람 이야기를 듣는 게 제 일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차 안에서 먼저 안아달라고 하더군요. 얼마 안 돼 섹스도 했는데 신혼 초부터 각방을 써서 1년 만에 하는 거라고 마치 자랑하듯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감정에 충실할 뿐 사랑은 모른다고, 죽을 때까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현재만 중요할 뿐이며 영원이 있든 말든 영원을 사는 법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현재란 사실 시간 가운데 없다는 걸 모르는 말이죠. 공부하는 것 때문에, 외로움 때문에 잠시 이용하는 것일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처음엔 상처가 깊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병든 여자들, 상처 많은 그네들은 일정한 패턴을 보입니다. 미아 역시 병들고 아픈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부족해 보이고 상처투성이인 사람에게 끌리고 매력을 느끼느냐고 묻더군요.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와 가까워지면서 그 병의 근원을 탐구했습니다. 제가 시기한 건 아이를 지배한 악, 그 비정상적인 모든 것들의 근원입니다. 미아는 자기 존재를 원래의 본질 대신 목적 없는 자유를 추구하고 채우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싫어했던 일이 자기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그 아이의 자유라는 거, 별것 아닙니다. 자유가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고 먹고 싶은 걸 먹고 만나고 싶은 남자를 만나는 방종이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언가에 사로잡혀 자기를 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두대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삶을 살아 내면서 어떻게 물리적인 것 너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실존을 찾아가는 건 진짜 현실에 눈뜨는 일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요? 그거야말로 사람의 본질, 목적을 겨우 성별로 국한하는 여성 차별이자 비하입니다. 계약 결혼을 하고 자유연애에 동의한 보부아르가 질투에 눈이 멀고 사르트르를 시기한 이유는 자가당착에서 나온 비정상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설명하거나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궁극적인 것입니다. 초현실적이거나 초월적인 것들, 영혼 세계만을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 텔로스로 채워진 본질만이 땅을 밟고 서 있는 지금의 실존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목적을 잃은 본질은 실존 자체를 위협할 뿐입니다. 그때의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했군요.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달랐고, 자매 마음대로 하는 행동들이 싫었던 것 아닙니까? 악마의 화로는 형제 안에 있습니다.”
“네 번 정도 만났을 때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더군요. 작심한 듯 말입니다. 울고불고 차 안에서 안기고 키스를 퍼붓더니 길바닥에 뒹굴고 별 쇼를 다 했습니다. 마치 이게 내 본모습이니 실망했으면 떠나라고 암시를 준 것 같았습니다. 저도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아이의 아픔을 모른 척하고 끝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신혼 초부터 버림받아 오랜 외로움에 시달렸던 미아가 저를 만나면서 눌려 있던 폭발적인 감정을 터트렸다는 것도, 그런 점에서 저를 이용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 때는 장면이나 이미지로 기억하지만, 어른이 되면 단어로 기억하게 되는 축소 현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단어가 될까, 어떤 낱말로 남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저 또한 누군가의 과거로 끝날까 봐 걱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거나 진상을 부려서 화가 난 게 아닙니다. 아이에게서 과거 제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미아를 아프게 한 과거 사건들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술에 취해 낙태한 과거를 흘리듯 말하고 매달리고 진상을 부리는 모습에서 아이 실존의 연약한 모습을 봤고, 그 존재를 감싸 주지 못한 남자들에게 화가 났습니다.
악에 대처하려면 분노하되 냉정해야만 합니다. 악령이 어디까지 아이를 붙들고 있나 시험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연락하지 말자고 했더니 집 앞으로 찾아와서는 미안하다며 제발 가지 말라고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며 다시 잘해보자는 사람은 또 금세 사라졌습니다. 잠시 주춤했던 악이 다시 고개를 쳐든 것입니다. 자기 계획만 있었지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았고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본색을 드러냈지요. 처음에는 이혼 후에 아픔을 극복하고자 힐링이 필요했고 그래서 제주도를 가겠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라고, 3개월 정도 살다가 마음 정리하고 올라와 체코 프라하로 여행을 다녀온 뒤 내년부터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미아에게는 잠시 휴가철을 맞아 그저 바람을 쐬는 일이 필요했던 겁니다. 아픔을 극복하려고 간 것도 아니고 제주도에서 새로운 답이 있기를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퇴직금을 주지 않은 회사가 싫었고 어머니와 집에 있는 것도 싫었고 이혼한 전남편을 의무적으로 만나는 일이 싫었고 외로운 데 갈 곳 없는 일상이 반복되는 게 싫었던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었던 겁니다. 독립을 시험하고 싶기도 했었죠. 잠시 떠나 있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고 그때가 되면 올라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뚜렷한 목표 의식이나 준비 없이 갔습니다. 그토록 정착하고 싶었으면 언제든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있었던 제주KBS에 아는 분과 연락이 닿았으면서도 찾아가지 않았고, 괜찮은 조건을 제시한 몇몇 사진관에서 일할 수 있었음에도 사진작가로서의 삶이 끝난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걱정이 됐겠습니까. 매주 주말마다 제주도에 갔습니다. 함께 집을 구하고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습니다.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미아란 존재를 진실로 직면하게 된 건…. 한 침대에 누워 함께 잠을 자고 있으면 아이를 지배하고 있는 악령들이 제 꿈에 침투했습니다. 그 친구의 과거가 녹아든 현재를 함께하며 미래가 보였습니다. 상상해낸 게 아닙니다. 그런 아이의 실존을 잘 알고 있으면서 분노하기보다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아이의 본질, 텔로스로 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보였습니다. 그 목적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장애물들, 악한 세력도 보였습니다. 만났던 남자들마다 원인도 모르고 피해 달아났던 그 두려움, 내면의 어두움, 악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 모두가 보였습니다. 단순히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선 역전이였습니다. 피하지 말고 부딪히자고 결심을 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 현실은 사실 영적인 세계와 연결돼 있고, 우리는 그 전쟁 가운데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오해할 게 분명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대들 게 뻔했습니다.”
대답하던 남자는 말을 멈추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치료 과정에서 실패 위기에 처한 치유자가 다음 상담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양반 다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질문을 이어 갔다.
“왜곡된 사랑과는 다른 부분이 있군요.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사랑이 부른 탐식 아닙니까? 온갖 사건들을 겪으며 배는 이미 찢어질 상황, 그 끝 간 데로 치달았지만, 영혼은 텅 빈 상태란 말입니다. 역치점을 넘어섰기에 역전이 된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도 아니면, 형제는 모든 여자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굴었던 건 아닙니까? 매주 제주도를 제집 드나들 듯 다니고 뒷바라지를 하며 뜨겁게 사랑한 건 결국 자기만족을 위해 클라라 자매를 이용한 것 아닙니까? 지나침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안 된 상황이었습니다. 저 역시 사랑을 하지 않겠노라고 오래전부터 맹세한 독신주의자였고 고의로 방황하고자 그 밑바닥으로 기어들어 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점이 두려웠습니다. 사랑하게 될까 봐, 사랑받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서로 느꼈습니다. 가슴이 저리고 아팠습니다. 미아 역시 저를 생각하면 그랬다고 합니다. 저는 생전 보지도 못한 어머니 꿈을 생생하게 꿨고, 미아는 치유 과정에 있어 제가 잔인하게 굴 것을 예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자신을 비웃는다든지, 메일을 보내 전부 장난이었다고 이별 통보를 한다든지 하는 과거와 연결된 허황한 꿈이었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마음이 하라는 말을 했고, 시키는 대로 따라 살아왔습니다. 자제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단지 아이의 회복을 바랐고 악한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대속하고 함께 아파하고자… 그래서 기투했습니다. 제 욕심을 채우려거나 모두에게 친절해서는 한 사람을 위해 그런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악의 뿌리까지 뽑아내는 일은 혼자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매정해야만 했습니다. 채찍질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직면하지 않고, 그 내용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자아를 극복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악한 힘의 지배를 받지 않았음에도 그 영향으로 무의식중에 사고와 감정, 행동에서 악의 양상들이 저에게도 나타나 갈등이 시작됐다는 사실입니다. 치유자의 입장에서 중립이 저해된 건 물론 공감과 이해력이 손상돼 맹점에 다다랐습니다. 낮이면 꾹꾹 누르며 참았던 감정이 밤이 되면 터져 나와 온갖 저주와 욕설로 쏟아지는 행동을 초래했습니다. 강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깊이 그 존재 전부를 받아들였기에 치유 과정에서 역전이 된 사태가 벌어지는 건 당연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영혼의 동반자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아이는 그 말의 의미를 백 퍼센트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될 줄은 몰랐지만, 어렴풋이 예감은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관계로 치달을지를 말입니다.”
남자가 어디까지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추궁하고 싶었다. 남자가 하는 말은 비현실적이며 몽상가가 만들어 낸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다. 스스로 유로지브이이자 순례자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다 마신 잔에 뜨거운 물을 다시 부으며 질문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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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