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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 없습니다. 한사람에게 온전히 기투하려면 우선 과거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이혼 후이든 동거 후이든 말입니다. 마스터키를 돌려받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아가 입원했을 당시에도 연락한 적 없습니다. 아이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이 눈과 귀를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전에 만나던 남자와 저를 동일시한 것뿐입니다. 저도 그저 그런 남자라고, 제 메일과 스마트폰, 과거를 엿보고서는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운명이 아니라서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내면에 있는 그 어두운 영이 이미 아이를 지배한 상황에서 착시현상과 착각을 유도했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아이를 놓지 않으려고 한 거죠. 그러고는 얼마 있지도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만 왜곡된 소문을 퍼뜨립니다. 악의 자기 정당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놈이 바람을 먼저 피웠다든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줬다든지, 자신에게 금전적 상해를 입혔다든지 하는 핑계로 말입니다. 그 과거는 제가 잘 압니다. 만났던 모든 남자를 음해로 쫓아냈습니다. 상처로 똘똘 싸인 아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백분 활용하고 계속 성공해왔던 악마가 한 짓입니다. 이미 저주에 휩싸인 불쌍하고 가련한 영혼을 악마는 끝끝내 놓지 않으려고 지금도 달래고 있습니다. 아이가 사랑을 받거나 사랑을 하게 되면 악령은 갈 곳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저 역시 가장 약한 순간, 즉 역전이가 된 상태였지만, 돌아오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곳에 혼자 있지 말고 모두가 걱정하고 있으니 고집 그만 부리고 다시 돌아오라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나까지도 병들 게 분명하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원인도 모르고 악마가 만들어 낸 환상에 눈이 멀어 달아났습니다. 함께 견뎌야 하는데 제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착각해 한마디 상의 없이 혼자 정리했습니다. 그게 속 편한 길이라면서 말이죠.
이후에도 저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다시 외로움이 찾아오고 의지할 곳이 없자 헤어지자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람이 시흥시 모처의 승마장에 왔다고 통보했습니다. 바로 뛰어갔습니다. 정욕이 아닙니다.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시설도 낙후되고 말들의 순치도 제대로 안 된 위험한 곳이었죠. 가보니 모래만 깔아 먼지 풀풀 날리는 실외마장에서 말을 탄 탓에 기침을 잔뜩 해 더는 말을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집에 와 우선 씻고 난 뒤 자정까지 이야기했는데 그제야 말하더군요. 제가 전에 만났던 여자에게 다시 연락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모든 문자 내용과 메일, 일기를 비교해 증거를 댔습니다. 사실이 아니었던 상황을 미아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단단히 착각했다는 사실에 당황했을 뿐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악마가 작당해 아이를 흔들었지만, 제 앞에서는 어떤 속임수도 거짓도 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미아가 다른 남자와 부정을 저지른 뒤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가 부정했다고 착각해 또 다른 남자를 이용했고, 저를 만나면서도 그 남자와 계속 연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픔까지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남자의 증언은 반증에 반증을 더했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남녀 관계란 누구도 모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바람이 나거나 마음이 떠나는 건 금세 티가 난다고 또 입을 모은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태, 자신이 빠진 세상을 허락하지 않는 교만한 세태의 증거다. 남자에게는 실제 그런 증거가 없다. 당당하게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내 영혼이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추궁해야 할 것들은 많이 남아 있다.
한참 이야기를 한 탓일까. 남자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지만 눈은 더 밝았고 냉정함이라든지 심사숙고하는 모습이라든지 뭐랄까,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견고한 자세는 유지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소화를 돕는 우엉차만 마셨기 때문에 약간의 허기도 느껴졌다. 밤이 깊어졌으니 여자에게서 혹 연락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모두를 위해 서둘러 대화를 끝내는 게 나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고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행위 그 자체가 욕심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사랑 아닙니까. 최소한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죠. 뜻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 탐욕의 극치입니다. 자기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 의심도 스며듭니다. 자매가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해 홧김에 다투고, 전남편과 어머니께 연락한 것 아닙니까? 사생활 침해이자 간섭입니다. 극에 달한 투정입니다. 불룩 나온 올챙이배와도 같은 상황입니다.”
내 질문을 고분고분 듣고만 있던 남자는 처음으로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차, 싶었다. 가끔가다 교우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진심처럼 되뇌던 버릇이 툭 튀어나왔다. 여자의 고해만 들었던 것도 문제다.
“신께서는 지옥불에 뛰어들겠다는 인간의 의지까지 존중하시겠죠. 그때는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창조한 책임 때문입니다. 스스로 원해 에로스에 머무르고 곧 헤어질 절차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연인, 심지어 다정다감한 남자와 관심을 보이는 여자에게 홀리는 이런저런 부부들조차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상대에 대한 배려를 대부분 혼동합니다. 에로스의 한계입니다. 존중 없는 고백과 행위는 철저한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일은 에로스에서 끝내야 합니다.
단 한 번도 미아가 제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역시 없습니다. 사물을 대하듯 사람을 쉽게 만난 적도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 역시 운명이 아니기를 계속 거부했었습니다. 신도 바꿀 수 없는 여자라면 저 같은 남자가 뭐라고 한 사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를 소유하려 드는 사람은 세 명의 여자뿐입니다. 어머니와 두 친구가 빗나간 자식 사랑과 필리아를 아이에게 주입시켰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이혼한 어머니는 힘들게 두 딸을 양육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비싼 과외도 시켰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낀 아이는 외로움에만 적응했을 뿐 그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실 재능도 없었죠. 마음을 잡지 못하고 공부도 데면데면했던 아이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자 어머니는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권유했습니다. 그게 사진이었어요. 신구대학 사진과에 입학한 아이는 그때부터 방황했습니다. 어릴 때도 버림받았는데 미래에도 자기 힘으로 먹고살아 가야 할 상황이 암담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제힘으로 돈을 벌어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고 주문합니다. 곧바로 취업하고서는 집이 아닌 회사와 남자, 여러 취미 생활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해방을 위해서입니다.
스무 명이 넘는 남자를 거치고 편하게 만나다가 결혼해서는 어머니가 사는 집 근처 오피스텔에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머니도 미아도 모두 만족했지만, 남편에게는 대출금을 갚는 일만 남았죠. 어머니는 매일 신혼집을 찾아 딸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처럼 아이가 방황하는 모든 게 자기 탓 같았기 때문입니다. 집 안 청소는 물론 장을 봐서 냉장고에 먹을 것을 쟁여 두는 일까지 어릴 적 못 해줬던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이는 보상 심리로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어머니께는 용돈 한 푼 드리지 않았지요. 암에 걸렸을 때도, 같이 사는 지금도 어머니는 수입이 하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몸을 팔아서라도 네 꿈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허황한 말로 딸의 오랜 분노를 잠재우는 데 급급합니다. 이혼한 뒤 다시 어머니 집에 와서는 당연하다는 듯, 어릴 적 누리지 못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아도 어머니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한 두 사람만의 줄다리기라는 걸. 서로 지쳐가고 있고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무언가를 당기고 있고 힘을 쏟고 있다고 믿기에 그 줄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혼한 모녀가 서로를 향한 왜곡된 소유욕을 쏟아 붓고 있을 뿐입니다.
미아에게는 가정환경도 상처도 남자를 대하는 태도도 똑 닮은 두 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은주라는 친구는 아버지의 폭력과 성추행으로 어릴 때부터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은둔형 외톨이입니다. 정신병원을 수없이 들락거렸고, 지금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입니다. 35살이 되어서야 해방할 용기를 갖고 채팅에서 알게 된 재미교포와의 결혼을 위해 회사도 그만두더니 작년에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남자는 미군인데 파병을 이유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고, 한국인인 시어머니는 한국적이지 않은 은주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매일 이혼한다며 평탄치 못하게 지내고 있죠.
또 한 친구는 혜진이라는 노처녀입니다. 잡지 기자로 사회에서 만났죠. 군인인 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 상처가 깊고, 그로부터 비롯된 남자 편력은 미아와 공통분모를 이뤄냈습니다. 이십 대 중반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마치 경쟁하듯 남자를 번갈아 만났습니다. 하지만 승자는 늘 미아였습니다. 혜진이는 키도 작고 통통했고 새까만 피부를 가졌지만, 미아는 가슴 하나로 남자들을 홀리기 충분했죠.
남자들을 이용해 서로가 더 잘 나간다고 경쟁하는 겁니다. 은주는 기댈 친구가 없어서, 혜진이는 미아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우정을 빙자하고 있죠. 미아 역시 자기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두 친구를 만나왔습니다. 이 역시 미묘하고도 여자만이 알 수 있는 잘못된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국드라마의 악영향입니다. 아직도 보수적인 나라에서 유교적 세계관에 갇힌 남자들을 사물화할 때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처받는 건 결국 여자들입니다.
그래요, 혜진이의 바람대로 미아는 추락했습니다. 물론 미아도 혜진이를 이용해 이혼을 정당화했습니다. 이혼을 고민하고 있을 때 혜진이를 집에 초대해 자신은 쏙 빠진 채 남편과 대화하게 했고, 혜진이가 ‘말이 안 통한다’고 결론을 내리자 팔랑귀인 척 자신의 이혼 결심을 굳혔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비겁하고 남루하게 친구를 이용한 것이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저에게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은주가 미국으로 가기 전날, 그러니까 악령에게 눈과 귀가 쏠려 오해하고 헤어지자고 했을 때 만남을 주선했죠.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은주를 통해 확답을 받게 한 겁니다. 미아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둘 것을 강요했죠.”
여기서 남자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나는 탁자 밑에 숨겨둔 재떨이를 들이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실 저는 미아가 전남편에게 다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더는 방황하지 말고 나를 떠나 첫 남자에게 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남편이라는 사람은 자기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절대 돌이키지 않는다고 선언했답니다. 왜 그랬을까, 오래 고민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 전남편, 김경용 씨야말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독신주의자였던 그는 진지했습니다. 연애 때는 여자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프러포즈를 했고, 결혼 후에는 투잡을 뛰며 집안 살림을 책임졌습니다. 가족도 아내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도록 희생했고 아내의 바람까지도 눈 감았습니다. 심지어 아내 때문에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답니다. 헤어지자는 요구까지 받아들였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아내에게 결국 지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미아 역시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끈덕지게 구애하자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됐지만,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지 않고 이혼을 선택했습니다. 남편이 아니라 남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남녀평등, 맞벌이라는 이유로 손수건 한 번 다려준 적, 따뜻한 아침상 차려 준 적, 넥타이 매준 적 단 한 번 없고 철저하게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표현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형을 껴안고 사는 아이 같은 아가씨는 결혼할 준비가 안 된 걸 알면서도 경험삼아 도전해 보는 겁니다. 아이를 낳고 손주를 봐도, 하늘 구름으로 솜사탕을 만들고 싶다는 소녀의 감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결핍과 방어기제를 버리지 않으면 아이를 낳으려 들기는커녕 얼마 못 가 이혼을 당연시합니다.
이혼한 여자들의 공통점을 보면 외로움을 쉽게 느끼고 포기가 빠르다는 겁니다. 사람의 말을 꼬아 듣는 악벽도 있습니다. 이혼한 뒤 여러 형편에 따라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성향을 타고 나서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천성적으로 그네들이 연약하고 의존증이 강하면서도 그것을 채워줄 남자를 못 만났으며,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나르시시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불쌍한 자기 자아를 찍어 집착하고 애착하는 일을 정당화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아무의 말이나 따라하는 앵무새, 스스로 유괴당하기를 자처하는 아이로 퇴보합니다. 얼마나 많은 여자아이들이 결혼을 연애 끝의 도피로 삼은 뒤 이혼하고 다시 연애 전선으로 뛰어드는 비극을 선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남자가 많았던 그네들은 결혼 후에 수다를 나눌 여자 친구가 없어서 결국은 이혼하고 다시 남자를 만나러 다니다가 혼자가 됩니다. 깔때기가 좁은 여자들입니다. 뜨끈뜨끈한 이혼녀들, 처녀막을 팔아먹은 처녀들, 상처 많은 노처녀들, 갈 곳 없는 내연녀들, 새 희망을 꿈꾸는 돌싱들처럼 지적 수준이 얕고 우유부단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그네들은 피험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유부녀들은 같은 여자로서 누려야 할 유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혼하면 일상을 공유해야 하는데 일상 나누기를 거부한 그네들에게 남는 시간 활용법은 바람뿐입니다. 세탁기, 청소기, 건조기가 여자들이 바람을 피우는 근본 원인입니다. 친구들과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게 건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여자는 경쟁의 대상이니 남자들을 홀려 자기 위상을 확보한다는 세계관을 포기하지 않죠. 하지만 이젠 어린 여자들한테 밀릴 나이고, 과거의 행실이 얼굴에 드러나니 남자들도 피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방에 틀어박혀 멍 때리거나 병들어 있는 시간만 길어지고, 회복을 스스로 포기하게 됩니다. 끝까지 투정을 부려도 받아주는 게 사랑이라는 망상까지 덧입혀집니다. 악령만이 쾌재를 부를 수 있는 현실이 된 것입니다.
남자 역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자와 한집에서 살았으니 닮아가는 건 빤한 이치입니다. 전남편은 여자가 원한 대로 결국 남이 되고서야 정신을 차리게 됐죠. 또 하나의 전리품이 됐다는 사실, 여전히 이용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겁니다. 저와 잠깐 헤어졌을 때, 전남편이라는 사람이 이태원에서 국제커플 파티를 한다고 초대권을 준 적이 있더군요. 헤어진 남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행동의 동기가 뭘까 생각했죠. 미아가 외국인과 결혼해 혼혈아를 낳고 싶어 하는 로망이 있다는 걸 알고 복수한 겁니다. 똑같이 희롱한 겁니다. 멍청한 여자만 그 의미를 모른 채, 좋다고 친구와 함께 파티에 갔답니다. 치즈를 덜컥 문 거죠. 그런데 그날 자기보다 가슴도 키도 작고 못생겨서 액세서리처럼 데리고 다닌 친구 혜진이가 스페인 남자에게 선택됐죠. 일반적으로 외국인들은 동양 여자의 작은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선택되지 못하자 아이는 분했습니다. 비를 맞은 외국 남자들이 얼마나 초라한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외국인들과 즐기고 싶은데도 서양 여자들과 별다를 것 없는 자기 떡대 때문에 선택받지 못하자 분노했죠.
헤어지고 나서야 아이는 잠시 후회합니다. 자기 몸뚱이에 남은 상처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왕 이혼했으니 이제는 덜 불행해지자고, 이혼 후 생기는 자격지심도 스스로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다짐하기에 이릅니다. 이기적이거나 남자를 지치게 해서가 아니라 정에 약하고 순진했기 때문이라고 자위합니다. 답습된 과거의 습관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저를 만나면서도 전남편과 몰래 연락해 수십 번 만났습니다. 이혼한 남편은 다시 남자로 신분이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서 올라올 때도 연락해 집까지 짐을 실어 달라고 했습니다. 사업자등록증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일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관계를 유지한 이유는 끝까지 잡지 않는 전남편에게 변하고 있음을,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미련도 없지 않았겠죠. 그 이후 저는 전남편과 만나는 것을 인정할 테니 숨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스스로 상처를 내는 일이니 솔직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미아가 메모를 남긴 수첩을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쓴 편지글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둘이 다시 합쳐 천상의 하모니를 연주하자고 하더군요. 이미 남자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도록 스스로 종용한 걸 인정하지 못한 어리석은 짓이었죠. 알고 보면 만났던 모든 남자에게 그래 왔습니다. 그 점에서는 변할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변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다시 합칠 생각은 없는지 담판을 져야겠다고 말입니다. 사생활 침해이든 욕먹을 짓이든 어떤 비난도 좋으니 미아를 대신해 물어야만 했습니다.”
“작년 말,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였겠군요.”
“맞습니다. 부천에 있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었습니다.”
남자는 내가 시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여자도 몰랐기에 나도 모를 수밖에 없었던 사실, 연락한 것에 그치지 않고 전남편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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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