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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지각이야. 이름이….”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검은 얼굴의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수업 첫날이라 그런지 강의실의 반 이상이 가지각색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는데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진아와 자주 만나기 위해서는 학원에 다닐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주말 내내 앞으로 살아갈 문제를 고민했다. 내년 8월에 있을 시험 때까지 학원에 열심히 다닌다는 핑계로 학원 근처에 자취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방을 얻고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 집과는 연락을 끊고 무언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함께 살 사람을 찾게 될지도 혹은 진아와 함께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다시 이런 말도 안 되는 학원에 와 있게 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밥을 챙겨 먹고, 6시 14분에 지하철을 타서 아침 자습시간에 맞춰 학원에 도착해야 했지만 오늘은 15분 늦게 지하철을 탔다가 보기 좋게 지각했다.
“준이라고 합니다.”
“그래, 자네가 준이군. 아무튼 첫날부터 지각했으니 임시 반장을 하도록.”
“네? 그렇지만….”
“저 앞자리로 가서 인사하고 수업 시작하지.”
“아, 알겠습니다.”
세 개 분단으로 나누어진 강의실의 오른쪽 분단 맨 앞자리 책상이 비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 선생님이 눈짓을 했다.
“자, 반장.”
“차, 차려. 인사.”
나는 어정쩡하게 일어나 어색하게 구호를 붙였다.
“안녕하세요!”
“깔깔깔.”
“하하하.”
뒷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아이들은 인사가 끝나자 소리 내 웃었다. 다들 오랜만에 느낀 어색함 때문일까.
“자, 주일 잘 보냈어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이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오늘부터 정식 수업이 시작되니까 열심히 합시다. 지난주에 내 이름을 안 가르쳐 줬지? 난 이 반의 담임인 국어 전공의 정호영입니다. 내년 8월까지 모두 열심히 해서 모두 다 합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들만 믿고 꾸준히 하면 아무 문제 없이 다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지난주 테스트 결과를 보니까 우리 반은 가장 기초부터 천천히 시작해도 될 것 같더군. 쉽게 천천히 할 테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어려운 것 있으면 언제나 선생님들께 물어보고 그래요. 지난주 테스트에서는 영어 수학 두 과목 중에 여기 준이 학생이 단 하나만 틀렸어. 준이 학생이 우리 반 일등입니다. 축하 박수를.”
「짝짝짝」
느릿한 속도에 반말과 높임말을 섞어 쓰는 선생님의 말투 때문에 그리고 갑작스런 이야기에 당황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선생님만 바라봤다. 문제가 쉽긴 했지만 그것보다 일등을 했다는 것이 민망스러울 뿐이었다.
“오늘 하루 잘 보내고 있다가 봅시다. 지금부터 8시까지는 자습시간이니 조용히 하도록.”
선생님이 나가자 분위기는 잠시 술렁거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다들 준비한 교재를 꺼내서 보고는 있지만 무언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찬 표정들이다. 열정만은 마치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같은 국가고시가 아니겠는가. 8시에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나갔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죠? 지난주에 시험 답 물어봤던.”
“아, 네….”
“그때 이름을 말 못 했네요. 난 윤정이라고 해요. 이윤정.”
“전 준이라고 해요.”
“몇 살이죠? 서로 말 놓고 편했으면 좋겠는데…. 난 스무 살.”
“누나네요. 전 열일곱 살이에요.”
“그렇구나. 미안한 말이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어. 말 놔도 되겠지? 준이도 편하게 대해.”
서로의 이름과 나이가 밝혀지고 난 후 편하게 느껴진 건 처음 같다. 윤정 누나는 내 옆 빈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준이는 어디 살아?”
“안양이요.”
“꽤 멀구나. 새벽같이 일어나야겠다. 안 힘들어?”
“조만간 이사할 생각이에요.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하려고요.”
“난 대학로 근처에서 언니랑 같이 살아. 아무튼 잘 지내자.”
“네, 그래요.”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다시 강의실로 들어와 제자리로 가서 수업 준비를 했다. 늦게 와서 처음 보는 얼굴들도 몇 있었다.
상업 과목 강의로 일과가 시작됐다. 상업, 영어, 수학, 생물…. 첫 수업이라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거나 인생 이야기들을 듣거나 검정고시를 통해 명문대학에 간 선배들의 이야기들을 듣거나 수업 개요를 들을 뿐이었다. 공부에 자신은 있었기에 남은 10개월의 시간이 지루할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오래 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걱정이 들었다.
고의로, 한 방향으로만 쓸어내린 머리 스타일과 면도를 안 해서 지저분해 보이는 수염이 인상적인 생물 선생님 강의가 끝나자 점심시간이 됐다. 앞자리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도시락을 싸 와서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했다. 그 외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다.
“준이야, 도시락 싸왔어? 없으면 내 거 나눠 먹자.”
“괜찮아요. 컵라면 사 먹으면 돼.”
“일부러 많이 싸 왔어. 같이 나눠 먹자, 응? 자, 여기 앉아.”
“고마워요….”
현미밥에 된장국, 메시 포테이토, 계란말이, 김치와 나물볶음까지. 이렇게 대단한 도시락을 싸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 할 텐데. 도시락은 정성이라고 했던가. 혼자 먹을 도시락을 싸는 것만큼 외롭고 이기적인 것 또한 없겠지만 누군가와 밥을 나누는 일은 언제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정말 잘 먹었어요. 맛있었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맛있다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자주 싸 올게. 자, 이제 다 치웠고, 우리 옥상 올라가자.”
“커피는 내가 살게요.”
“옥상에 자판기가 있을 거야.”
강의실이 있는 3층에서 한층 더 올라가자 맨 끝 구석진 곳에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따로 있었다. 계단은 건물 바깥으로 나 있었고 위험할 만큼 가파르고 좁았는데 많은 학생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나갔다. 단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 사람들은 옥상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작은 문을 하나 지나자 옥상이 나타났는데 수많은 학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옥상 가운데엔 작은 나무가 몇 개 심어진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주변엔 학원생의 반 이상이 몰려서 담배를 피웠다. 누나도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물더니 내게도 내밀었다.
“준이, 던힐 안 피워?”
“아, 난 담배 안 피워요. 커피나 뽑아 올게.”
“그래? 정말 담배 안 피워? 이거 의외인걸. 담배 안 피우는 사람 처음 봤어. 펴본 적은 있고?”
“그냥 조금 펴보긴 했지만 잘 안 맞는 거 같아서….”
“그래, 피우지 마. 안 피우는 게 좋은 거 같아.”
안 피우는 게 좋다면서 누나는 아주 능숙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훅’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갑자기 진아가 내뱉던 담배 냄새가 그리웠다. 이 순간이 교묘하게 그때와 겹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허락된 순간은 늘 말도 안 되는 현재뿐이었고 무언가를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늘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가능할 뿐이었다. 단지 추억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동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 하지만 게으름과 천재성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엔 삶을 망쳐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누나가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나서야 점심시간을 끝내는 종소리가 들렸다. 국어와 역사 수업을 듣고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일과가 끝났다. 누나와 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되도록 집에 일찍 가고자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이번 주 안으로 빨리 이사를 하려면 집도 알아보고 짐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지났다. 집을 구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학원비를 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며, 통학할 차비는 줄 수 있지만 따로 나가 살 수는 없다고 내 아버지는 말했다.
“학교를 그만둔 것도 네 선택이니 이젠 네가 알아서 해.”
“여보,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애들을 키우니까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어리광부리는 거야! 이제 자기가 살길은 스스로 찾아가라고 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그래도 당신 너무 하잖아요? 하나뿐인 아들이 공부 다시 하겠다는데….”
“통학하면 됐지, 무슨 자취야 자취는!”
“알겠으니까 그만들 하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상관 말라구요.”
“저 녀석이 저 말버릇하고는!”
「쾅」
아주 어릴 적, 방문을 세게 닫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화가 나서 방문을 세게 닫고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뒤 방문이 열리더니 이상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는 먼저 문부터 잠갔다. 잠자리채를 반으로 부러뜨리더니 때리기 시작했다. 잠자리채가 다 부서지자 맨손으로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난 피하지 않고 맞기만 했었다.
‘때려봐, 때려봐, 난 널 평생 저주할 테니까.’
아마도 이런 생각을 어린 나이에 했던 것은 감정이 실린 강자의 부덕한 폭력 때문이리라. 온몸에는 피멍이 들어서 나흘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 존재를 잊고 살았다. 그 이후로 처음으로 나는 방문을 세게 닫았다. 만약 당신이 지금 어린 내게 했던 것처럼 방문을 열고 때리러 들어온다면 나도 이젠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밤새 반젤리스의 음악을 들으며 짐을 쌌고 다음 날, 어머니가 구역 예배에 간 사이에 짐을 들고 집을 나왔다. 학원 강의 교재와 몇 권의 책들, 필기구, 여벌의 옷과 생필품을 정리하고 보니 커다란 배낭 두 개가 가득 찼다. 어릴 때부터 써왔던 일기와 노트들을 두고 가야 한다니 억울했지만, 조만간 자리가 잡히면 다시 돌아와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따금 지난 일기장을 펴보는 일을 좋아했다. 육체의 성장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었지만 생각이나 관념이 자라는 일은 일기장을 읽으면서 스스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 사고나 관찰력, 상상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반성적 사고를 제외한다면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생각이나 관념은 전부 외부로부터 온다. 생각이 들거나, 생각이 나거나, 생각하게 하는 주체는 엄밀하게 말해서 ‘내’가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야 비로소 미래를 확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됐는데 그것은 세계 최고의 사상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또래 보다는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때 어린 내 영혼은, 그 순간 아주 작은 틈새를 열었다. 넘실거리는 생각을 또 넘고 넘어서, 한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독히 무서운 정신분열과도 같은 늪에 빠지긴 했지만 결국엔 그것마저 뛰어넘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 선지자에 대해서도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인간의 발전상에 대해서도 칸트의 선험적 세계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적 세계관도 모두 순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을 읽지 않고서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의 주문에 빠지기도 했는데 이 세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선진국의 젊고 예쁜 모든 여자와 섹스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든지 -그것은 아마도 희대의 사기꾼이나 적그리스도가 되는 길뿐이라- 세 개 이상의 고소득, 전문직을 가지고 나름대로 만족하는 삶을 –일은 안 하고 놀 수 있는 관리자의 삶을 원했던 것이다- 산다든지 하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정신병원에 다녀와 검정고시를 준비하려는 보잘것없는 십 대에 불과하다. 당장 내일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대책 없는 불쌍한 놈이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은 삼백만 원은 통장에 고스란히 있다. 학원 근처 허름한 옥탑방 정도는 구할 수 있는 돈이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고 저녁에 일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을 다잡은 나는 그렇게 집과 인연을 끊었다.
<다음 호에 계속>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