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시작 #19] 일몰의 시각에는 바다에서 나와야 하는데

↑	나는 일 나가는 진아를 위해 이른 저녁을 준비해서 함께 식사하고 보내야만 성에 찼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사는 여자를 사창가로 보내는 남자만큼 나쁜 놈이 또 어디에 있을까.

“왜, 나랑 안 할 거야? 내가 싫어? 설마 더럽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해서….”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우리 이렇게 같이 있는 건 좋은데 결국엔 동거하는 거잖아.”
“응,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진아가 되물었다.
“그게 그냥 이상해. 실감도 안 나고….”
“그럼 일루 와서 나 안아주기만 해. 내가 실감 나게 해줄게.”
분명 진아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후 내내 서로 방에서 뒹굴며 이야기하다가 저녁에 밖에 나가 삼겹살을 먹고 왔다. 둘이서 소주도 세 병 정도 마셨다. 물론 우리 두 사람 다 취하지는 않았고 그저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어진 것뿐이다. 집에 와서 각자 샤워하고 캔맥주를 한 잔씩 더 마시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자려고 침대에 같이 누웠을 때였다.
“나 잠이 안 와. 원래 지금 한창 일할 시간이잖아.”
“같이 이야기라도 할까?”
불을 켜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서려는데 진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아니, 그냥 불 켜지 말고 이렇게 어둡게, 어두운 상태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이게 더 편해.”
아마도 옥탑방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먼저 달빛이 들어오는 곳일지도 모른다. 아파트가 아무리 높고, 아무리 높은 지대에 있는 집이라 해도 낮은 지대에 있고 건물들 사이에 가려 태양이 들어오지 않는 옥탑방일지라도 달빛은 그곳마저 구원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달은 태양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는데 아마도 전국 곳곳에 있는 옥탑방들이야말로 달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이지 않을까. 구원이 절실한 곳에 구원이 있는 것처럼,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은 것처럼….
진아는 몸을 돌려 나를 안았다.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속옷 안으로 손을 넣더니 내 성기를 천천히 만지기 시작했다.
“진… 진아야.”
“가만히 있어 봐.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페니스는 점차 발기했고 여자의 두 손이 모두 필요해졌을 때 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몸을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먼저 이불을 걷어내고 내가 입었던 팬티를 벗기고는 성기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허벅지와 배를 자극했다. 한 손은 내 오른손을 꼭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조금 아프게 누르다가도 미끄러워 무언가를 놓쳤다는 듯 손을 튕기고,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허벅지를 움켜잡고 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페니스는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버렸다. 온몸의 피가 다 몰린 듯, 세상 무엇보다도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듯, 이것이 바로 인간이 세운 불멸의 바벨탑이라는 듯….

-중략-

그날 나는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끅끅대다 지쳐 겨우 잠이 들었다. 침대 한구석으로 돌아누워서 계속 울다 보니 탈진할 지경이었다. 주문을 걸듯 나는 계속 ‘선생님’, ‘미안해요’ 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진아는 밤새 칭얼거리는 아이를 돌보듯 끝까지 나를 어우르고 안아주고 달래주다가 따라 울어버리고는, 나와 함께 잠이 들었다.
해가 떴을 땐 우리 둘 다 아무 말 없이 그리고 아무 기억도 없이 잠에 빠졌다. 그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속울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동거가 시작됐다. 진아는 매일 아침 이른 시간이면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었다. 마치 알람을 울리듯 내가 일어나야 할 시간에 정확히 맞춰왔다. 미루도 언제부턴가 나와 같이 잠들었다가 새벽에 먼저 일어나 진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일하고 온 진아가 깨울 때마다 나는 마치 기둥서방이 된 것 같아 머쓱한 기분마저 들었다. 진아가 화장을 지우고 샤워하면 나는 아침상을 차린다. 진아가 사 온 수많은 주방용품과 조리 도구, 갖가지 모양의 그릇을 사용하기 위해 매일 새로운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청소하고 밥을 짓는 나만의 집을 갖고 싶다고 진아는 말했었다.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것은 거의 내 몫이 됐지만,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아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여 아침을 먹고 설거지한 후에 샤워를 했다. 진아는 새로 산 더블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다. 학원 갈 준비를 마저 하다가 코를 고는 진아를 볼 때면 안쓰러웠다. 언제부턴가 진아 입가에는 아주 얇은 주름이 하나둘씩 퍼져 있었는데 손님을 향해 억지웃음을 짓느라 그랬을 것이다. 그런 진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볼에 키스하고 짧은 메모를 남기고 학원에 가는 일이 일상이 됐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은 진아에게 줄 선물을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데 평소와 달리 진아가 잠에서 깼다.
“어, 안 잤어? 깨워서 미안해.”
“아니야, 안 자고 있었어. 나 할 말 있어.”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야?”
“크리스마스 얼마 안 남았잖아. 우리 바닷가 가자. 바다가 보고 싶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진아는 그냥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조금은 어두웠다.
“그래…. 좋아. 언제 갈까? 동해로?”
“이브 날 휴가 낼 수 있어. 제일 바쁠 때이긴 하지만 괜찮을 거야. 아침에 바로 떠나자. 학원은 괜찮겠어?”
“나야 뭐, 괜찮아. 알았어. 어서 자. 몸 따듯하게 하고.”
“그럼 나 잘게. 잘 다녀와요, 여보.”
늘 이 시간만큼은 내게 ‘여보’라고 했다. 마치 출근하는 남편에게 하는 것처럼 혹은 그러길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언제부턴가 그렇게 불렀다. 조금은 지친 그러나 여전히 앳된 미소를 지으며 누운 채 손을 흔들었다. 미루도 꼬리를 흔들며 배웅했다. 진아가 눈 감는 모습을 보고서 집을 나섰다. 문을 잠그고 옥상 마당 앞으로 나오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진아는 왜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일몰의 시각에는 모두가 바다에서 나와야 하는데도 말이다.

벌써 3개월째. 학원 생활도 잘 적응하고 있다. 아침 자율 학습부터 정규 수업 그리고 수학과 영어와 같은 중요 과목을 보강하는 단과반 수업까지 학원 일과가 끝나면 오후 3시다. 학교처럼 지겹거나 싫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열정을 다해 가르치는 선생님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공부가 재미있었다. 한때는 검정고시를 본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지금은 성취해야 할 목표다. 아버지는 가끔 검정고시도 패스 못 하면 인생의 가장 기본도 못 하는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떤 어른이든 자리에 앉혀놓고 검정고시 문제를 풀게 한다면 낙방은 불 보듯 뻔하다. 이 순간에 그들은 이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 있을 뿐이다. 검정고시 또한 하나의 자격이지 인생의 기준은 아니다.
홍균이 형은 그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끔 삐삐로 연락이 오는 정도였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나중에 한 번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전부였다. 세희나 용욱이 그리고 윤정 누나와는 여전히 친했다.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언제나 늘 함께였다. 나는 누나에게만 동거 사실을 말했다. 누나는 내심 걱정하면서 상대가 누군지 물었지만 그 이상 간섭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비밀도 잘 지켰다.
“준이야, 진아라는 애는 잘 있어? 어디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
“오늘은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잘 지내요.”
“언제 집들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진아가 누군지 궁금하다. 얼마나 예쁘면 준이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호호호.”
“누나랑 좀 닮았어. 그러니까 꽤 예쁜 거겠지? 집들이는 조만간 할게요. 아니, 그 전에 학원에 한 번 데리고 올게.”
“이제 대놓고 누나를 놀리는구나? 아니, 이거 질투 유발하는 거 아니야? 내가 준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무 망설임 없이 동거한다고 말하지 않나. 너 미워한다.”
누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 또한 누나에게 특별한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이곳에서 제일 먼저 말을 걸었던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친절한 사람이니까. 서로 말하지 않아도 주파수가 통하는 사람이다. 특히 선생님을 많이 닮았다. 넓은 이마 아래 큰 눈과 짙은 속눈썹 그리고 얇은 입술을 한 여자는… 내 이상형이기도 하다.
“에이, 놀리는 건 누나잖아. 아무튼 꼭 진아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약속 지켜야 해.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글을 쓸 거야?”
“에…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가 과학자로만 알고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의 명언을 적어 왔어요. 그의 저서 『팡세』에 쓰인 말이에요.”

- 두 가지 지나친 일, 이성을 배제하는 것, 이성만을 용인하는 것. 『팡세(253)』

임시 반장을 나이가 많은 정산이 형이 맡은 이후 나는 매일 아침 칠판 한쪽 구석에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명언을 적는 일을 계속 해왔다. 처음에는 담임선생님이 시작한 일인데 내가 가끔 좋은 구절들을 덩달아 쓰자 선생님은 그 일을 내게 위임했다. 그 이후로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그 구절을 읽고 자신의 단상, 혹은 구절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하고 수업하는 것이 우리 반의 전통이 됐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꼬마 철학자’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어린’이라는 말 대신 ‘꼬마’라는 말을 사용한 건 내 외모가 어리다기보다 성숙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내용이 어렵다거나 뜬금없는 내용을 적었을 때면 반 전체가 웅성거렸는데 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요구당하기도 했다.
“준이야, 중상(中傷)이 무슨 뜻이니?”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 하기엔 우리 나이가 많지 않아? 하하하.”
“니체라고 하는 저 사람 알아.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사람이지?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말이야. 천벌을 받을 사람이지.”
가끔은 나도 인간인지라 매일 쓰는 그 격언, 명언들을 내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서 쓰기도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비꼬는 듯한 느낌의 글을 적었던 날에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죄다’라는 말로 기억한다- 범수 형이 쉬는 시간에 뛰쳐나와 그 문구를 깨끗이 지우기도 했었다. 범수 형은 내 글을 지운 대신 자기 생각을 칠판에 적으며 자기 행동에 대한 이유를 밝히곤 했다.
“죄… 라는 것은 함부로 말해선 안… 안 되는 거야. 누구라고 공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어 하지 않… 않겠어? 머리… 머리가 좋고 나쁘고 아, 아니 그건 아, 아니고…. 공부를 하려면 돈… 돈이 필요, 필요하잖아. 엄마는 돈을 잘… 주지 않아. 내… 내가 돈을 가… 가지고 있으면 오락만 한다고 싫… 싫어해. 아… 아무튼 죄… 죄는 아니야.”
범수 형은 아버지가 국회의원이고 어머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장인, 꽤 잘 나가는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집안의 막내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범수 형 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인 인물이었다. 범수 형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던진 벼루에 맞아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했다. 덧니가 도드라지게 웃는 모습은 늘 어색했고 작은 눈을 수시로 깜빡거렸으며 말을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했지만, 흥분하지 않을 때는 심지어 올곧은 선비와도 같았다. 정직하고 착한 품성을 갖고 있었지만 송과선(松果腺)과 같은 것의 이상으로 성격을 표출할 때 그는 늘 불안정했다. 모두가 그를 피하거나 무시했다. 하지만 기억력이 뛰어났고 정리 정돈을 하는 일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하긴 결벽증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유별난 건 사실이었지만 깔끔한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범수 형과 친하게 지냈고 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허물없는 사이였기에 내가 쓴 글을 동의 없이 지워버리는 행동에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칠판에 짧은 글들을 썼다. 그것은 내게도 큰 기쁨이었다. 선생님과 같은 반 학생들이 글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내 나름대로 반박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늘 가지고 다니는 수첩에 메모했다. 가끔은 남의 명언인 것처럼 내 단상을 적기도 했는데 모두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니 수업을 빠질 수 없었고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서 자연히 공부에도 흥미를 갖게 됐다.
“음, 이성이라는 건 알아. 그 누구냐…. 아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거지? 윤리 시간에 배웠잖아.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라고. 그런데 파스칼? 파스칼의 말은 아리송해. 어려워.”
“이성은 우리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성질이나 기준을 말하잖아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했고. 그런데 인간이 이성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거나 혹은 이성을 버리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좋음은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에 있다고 했어요. 즉 이성을 너무 신뢰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파스칼은 이성의 한계에 대해 말하는 건데 그 한계를 인정하고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나는 인간 이성에 한계가 있다고 믿어요?”
“글쎄, 좀 어려운데. 인간이 잘 살 수 있게 된 건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달에도 가고 동물도 복제하는 인간 이성에 한계는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않니?”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볼게요. 나는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신이 있다고 믿는 전통적인 유신론자도 아니구요. 아마 신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에 가까워요. 그런데 이 불가지론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 이미 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보면 이 입장은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뿐인, 새로운 유신론인 거에요. 하지만 나는 외계인이 발견되고 타임머신이 발명돼 시간 여행을 하고 인간을 복제해서 같은 몸을 가진 다른 개체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이지 신을 부정하게 될 것 같아요. 인간 이성에 한계가 없어서 사상,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최소한 이 세 가지는 절대자의 권능이나 속성, 계시와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거든요. 신이 있다면 이 세 가지는 절대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언대로라면 곧 종말이 오겠지요. 인간 이성이 아무리 뛰어나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고 파스칼이 말한 것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준이야, 예전에 만화에서나 보던 유전자 조작, 우주 왕복이나 로봇의 등장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잖아.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이성 문제와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옆에서 듣고 있던 용욱이가 끼어들었다.
“그게 믿음이겠지. 신을 믿는 사람들은 결국 신의 섭리와 선한 창조, 구세주의 재림과 종말을 믿는데 종교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신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 또한 명백히 하거든. 특히 기독교는 말이야. 선악과나 바벨탑은 결국 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들의 패배 상을 보여줄 뿐이잖아. 오히려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신을 저주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정통적 의미의 이단이고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겠지.”
“아, 어렵다. 어려워. 우리 그만하자. 수학 문제도 못 풀겠는데 이런 거 싫어.”
손사래를 치며 윤정 누나가 말했다.
“그래도 준이는 뭐 예수를 믿어라, 이런 말 안 하네? 왠지 싱거운데? 하하.”
“말했듯이 나도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순 없어도 있다고는 명확하게 말 못 하겠다니까. 그게 진실이고. 신을 만날 수도 없고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겠어. 같이 사는 사람 속도 모르고 그들도 못 믿는데 말이야.”
“아무튼. 우리 엄마는 무당인데 집에 동자신을 모시고 있거든.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꼴들을 많이 봐서 안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믿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의외로 용욱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긍정했다. 그것도 결국 경험 때문일까?
“그나저나 준이 너, 요즘 수상해. 수업 끝나고 우리랑 놀지도 않고 맨날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우리한테도 공부 좀 가르쳐 주고 같이 놀아야 할 거 아니야.”
계속 조용히 있던 세희가 불만스럽다는 듯 갑자기 끼어들어 말했다.
“그게 말이지. 저녁에 일해야 하니까… 바빠서 그래….”
“일 구했어? 무슨 일하는데? 홍균이 오빠가 구해줬어?”
“으… 응. 형이랑 연락은 잘 안 되고… 그냥 서점에서 일해.”
“아무튼 크리스마스에는 휴가 내서 같이 뭉치기다, 알았지?”
“아, 나는 빼 줘. 미안해.”
“너 정말 그러기야? 이러면 섭섭해.” 용욱이도 거들었다.
“바쁘다는데 어쩌겠어. 나중에 준이가 한턱 쏘면 되지 뭐. 안 그래 준이야?”
윤정 누나가 내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미안해. 나중에 꼭 한턱 쏠게. 좀 봐주라.”
“뭔가 수상하긴 한데.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겠어.”
눈치 빠른 세희는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눈에 힘을 주며 나를 쳐다봤다.
“자, 수업 시작이야. 자리에 앉자.”
반장인 정산이 형이 한마디 했다. 우리 모두는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나는 여전히 맨 앞자리로, 내 바로 뒤에는 윤정 누나가 앉았다. 세희와 용욱이는 맨 뒤로 가서 앉았다.

집에 오는 길에 근처 시장의 금은방에서 순은으로 된 커플링을 샀다. 시장에서는 생닭 한 마리와 인삼, 대추, 밤, 찹쌀을 샀다. 한여름에나 어울리는 계삼탕이지만, 아침에 힘이 없어 보이는 진아를 위해 요리해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재료들을 준비했다.
집에 오니 진아가 없었다. 미루 혼자 집 마당에서 쌓인 눈을 장난감 삼아 놀다가 나를 보고는 달려들었다. 아침에 입고 온 옷은 그대로 바닥에 있었고 다른 옷도 그대로인 거로 보아 멀리 가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메모도 없고 삐삐로 연락하지 않은 것에 내심 걱정이 됐다.
‘금방 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계삼탕을 준비했다. 닭 내장은 이미 시장에서 손질했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에 물을 붓고 마늘과 인삼, 대추, 밤과 찹쌀을 넣은 닭을 잘 포개 넣어 불을 올리고 푹 삶았다. 냉장고에서 며칠 전 윤정 누나가 가져다준 김장 김치와 동치미, 시장 단골집에서 산 마늘장아찌를 꺼냈다. 사십 분쯤 지나고 닭이 흐물흐물해지면서 노란 기름이 올라왔을 때쯤 슬리퍼에 반바지 그리고 두꺼운 잠바를 입은 진아가 왔다.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아직 일 나갈 시간은 아닌데….”
“잠깐 약국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서….” 진아는 약국에 갔었다는 것이 맞는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약봉지를 흔들었다.
“약? 어디 아파? 친구는 누군데?”
“그냥 감기 기운이 있어서…. 친구는 그냥 아는 애.”
“많이 아파? 나한테 사 오라고 시키지 그랬어. 추운데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냐.”
“치, 걱정했구나? 얼굴에 다 쓰여 있네. 급하게 나가느라 연락 못 했어. 미안해.”
“밥 먹어야지. 삼계탕 끓였어.”
“우아, 정말? 역시 준이밖에 없다니까. 나, 닭 좋아하잖아!”
“그래, 어서 먹자. 먹고 또 일 가야지….”
“응….”
시장에서 아주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끓이긴 했지만 비린 맛이 좀 나고 인삼은 제대로 익지를 않았다. 처음 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지만 늘 2%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름은 덜어내 버리고 닭은 찢어서 소금에 찍어 먹기로 했다.
“맛있어. 준이야. 국물도 따듯해.”
“그래, 그나마 먹을 만하네.”
“국물에 소금 좀 넣어 줘. 여기에 밥 말아 먹을래.”
“자 여기, 고기도 좀 먹어. 피곤해 보여서 특별히 준비한 거라구.”
“응, 잘 먹고 있어요. 꼭꼭 씹고 있고!”
진아는 오후 5시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했다. 나는 일 나가는 진아를 위해 이른 저녁을 준비해서 함께 식사하고 보내야만 성에 찼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사는 여자를 사창가로 보내는 남자만큼 나쁜 놈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런 일상을 반복할 수 있을 만큼 그녀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랑하는 마음은 더 커갔지만 물론 점차 불안해진 것도 사실이다. 진아를 위해서 이른 저녁을 준비하고 가급적 이 시간에는 섹스하지 않았다. 우스운 말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관계를 했다. 그것도 진아가 원할 때만 못 참았다는 듯 응했다. 진아가 한없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아침에 말한 건 잊지 않았지?”
“우리 동해로 가자. 강구항이 좋을 거 같아.”
“강구항은 어딘데? 속초나 강릉, 이런 데 아니고?”
“좀 더 아래쪽에 있어. 대게가 유명하고 오래전에 유행한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하고. 사람도 적을 거야. 민박집도 쉽게 구할 수 있을 테고.”
“그래, 좋아. 그런데 나 어제 이상한 손님 봤었다.”
저녁 시간은 진아의 수다로 가득 차기 마련이었다. 아침에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잠들어야만 했던 진아는 일 나가기 전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전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마치 아주 오래된 이야기보따리를 손자 앞에서 풀며 사랑스럽게 대하는 할머니처럼….
“어제 눈도 왔었고 연말이라 요즘엔 손님도 많지 않잖아. 여진 언니랑 앉아서 얘기하고 있는데 한 서른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우리 앞으로 오는 거야. 뭐, 우리 둘은 늘 그렇듯이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안으로 들어와서 바지를 내리는 거야. 그러더니 그걸 꺼내고는 ‘야, 어떠냐, 이것 좀 빨아봐’ 라는 거 있지.”
진아는 먹고 있던 닭다리를 들어 그 남자의 행동과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천진난만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일종의 신비였다.
“여진 언니랑 나랑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는데 송이 그년이 갑자기 그 남자 걸 잡고는 ‘어쭈, 미친 또라이 자식. 쇼하고 있네. 까불지 마!’ 하더니 도로 앞까지 질질 끌고 가는 거야. 다들 막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데 잠시 뒤에 그 남자가 또 온 거야. 왠지 해코지할 것 같아서 순간 쫄았지. 근데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나 또라이 아니야. 사과해’ 라는 거야. 쇼윈도 앞에서 꼼짝도 안하고 있더라구. 여진 언니가 놀거면 딴 집에나 가보라고 말해도 묵묵부답이었어. 때마침 짭새 둘이 지나가길래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달라고 했더니 바로 도망가는 거 있지.”
“그래서? 그게 끝이야?”
“아니, 한 시간 뒤에 길 건너편 집에서 난리가 났어. 갑자기 방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더니 정인이라는 애는 그 남자한테 머리끄덩이를 잡혀서 알몸으로 길가에 팽개쳐져 밟히고…. 짭새들이 뜨기 전에 삼촌들이 먼저 남자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고 소방차가 와서 불 끄고 난리가 났지. 하마터면 우리가 그 꼴 당할 뻔했어.”
“다행이다….”
당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운이 없었다면 위험한 상황이었겠지만 운이 좋아 위험을 모면한 지금에서야 남 이야기하듯 말하는 진아가 안쓰러워졌다.
“퇴근할 때쯤 여진 언니가 말해줬는데 그 남자, 삼촌들한테 끌려가서 정말 뒈지게 맞았대. 신분증을 보니까 고등학교 선생이었는데 그게 더 삼촌들을 자극한 거야. 다리 하나는 부러지고 머리는 깎이고 장난 아녔대. 송이는 삼촌들한테 불려가서 엄청 깨지고.”
“그렇구나….”
“휴, 아무튼 좀 그랬어.”
“진아야, 말 나온 김에 나도 한마디 해도 돼?”
“뭐 어차피 늦은걸. 뭔데?”
“내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생각해서 여태까지 말 못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래 지금은 말을 해야 할 거 같아. 일 그만하면 안 될까? 나 진아를 그런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
“그런… 곳이라니?”
‘그렇다’, ‘저렇다’, ‘이렇다’, ‘그냥’과 같은 중립적인 말들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다. 또한 그 단어들은 단지 지시체로서의 역할만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무언가를 명확하게 밝히기를 꺼릴 뿐, 글쟁이들에게나 어울리지 않는 말일 뿐, 우리 삶은 그런 단어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진아가 있는 곳 말이야. 솔직히 청량리도 싫고 진아가 하는 일도 싫어.”
“내가 싫어진 거야?”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야. 진아를 사랑하니까, 그런 곳에 보내기 싫은 거라구.”
“그런 곳이라니? 어리광 부리지마.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라구! 내가 몸 팔고 웃음을 파는 게 더러워 보여?” 갑자기 진아는 화가 난 듯했다.
“진아가 더럽다는 게 아니야. 그냥 그 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누군 좋아서 하는 거냐구. 어쩔 수 없잖아?”
“좋아서 하는 게 아니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다른 일을 해도 되잖아. 편의점이나 옷가게에서 일해도 되고 그냥 평범한 일을….”
“그만해! 평범한 일이 뭔데? 그런 일 하면 누가 그만한 돈을 줄 거 같아? 누가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
“내가 일 할게. 일자리는 많아. 형한테 소개받은 곳도 있고. 내가 할게.”
“안 돼. 난 준이가 대학에 가는 걸 볼 거야. 준이는 공부해야 해.”
“진아도 다른 일 하고 나도 공부하면서 일하고, 그러면 되잖아. 응?”
“싫어. 내가 다른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아? 중학교도 못 나와서 어디에 취직할 수 있는데? 나 같은 년을 받아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하지 마! 난 그냥 창녀라구!”
진아는 스스로에게 냉소적이었다.
“그래,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다고 해. 하지만 이건 진아에게 어울리지 않아.”
“아니, 나한테 너무 잘 어울려. 나한테 아주 딱이야. 평생 몸 팔면서 살 거니까 앞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진아야, 처음에 안 그랬잖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그러지 않았잖아….”
“과거야. 난 변한 거고. 앞으로 간섭하지 마. 못 들은 거로 할게. 나 일 간다.”
행복했던 저녁은 엉망이 됐다. 커플링을 줄 타이밍도 놓쳤다. 진아는 화장도 하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는 서둘러 집을 나갔다.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다. 남자와 다르기에 여자, 여자와 다르기에 남자라지만 난 일을 계속하겠다는 진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반도 안 먹은 계삼탕은 이미 다 식어서 기름만 둥둥 떠 있었다. 살코기만 발라내 국물에 밥을 말아 미루에게 줬다. 닭고기는 개에게 먹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삶아서 뼈를 발라낸 닭고기는 괜찮을 거라고, 못 먹을 것을 미루에게 주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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