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위원 예상결과 실시간정보 KRJ방송 뉴스&이슈 커뮤니티 고객지원 모의베팅 경마문화PDF 마이메뉴
19(금) | 20(토) | 21(일)
이화령, 유준상, 석호필, 이청파, 정완교, 이영오, 정필봉  |  소광섭, 진실장, 이준동, 단칼, 이천배, 백동일
I  D
PW
회원가입   ID/PW찾기
  • 패밀리사이트
  • 말산업저널
  • KRJ방송
  • 경마문화
  • 퍼팩트오늘경마
HOME >> 종합뉴스 >> >> 기사보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밴드 트위터 구글+
제 목 [일몰의 시작 #28] “오늘은 내가 니 주인이라고.”
아니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하는, 오래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는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직선적이고,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특권을 가진 젊은이들이 안 어울리게도, 전혀 그럴 것이 아닌 일인데도 서로 눈치를 보고 하기 싫은 무언가를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택시를 잡아타고 업소로 와야 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망상과 기억들로 정신이 혼미해 버스나 지하철을 탔다가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입구에서는 두 덩치가 나를 반기며 창백한 얼굴을 한 이유를 물었고, 매니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어서 일할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룸을 세팅하고 청소 상태를 살펴본 후 주방에서 얻은 약간의 감자튀김과 오렌지로 끼니를 때웠다. 곧이어 여자들이 왔다. 민정이라는 여자의 부탁으로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몇 개 사 왔다. 입구 근처에서 손님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술과 안주를 날랐다. 술 취한 여자들을 깨우기 위해 약을 먹였으며 손님들이 간 뒤에는 룸을 깨끗이 청소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모든 것이 평상시대로였다. 단지 나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무조건적인 반응대로, 이제까지 살아왔던 대로 움직였다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일차로 남자 손님들이 돌아가고, 민희를 포함한 여자들이 이차를 나가고, 그들을 위해 택시를 불러 배웅을 한 후에 청소를 끝내고 대기룸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지만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있는 사고의 시작점이 떨어져 나가버린 것 같았다.
새벽 2시가 가까워지자 용욱이와 간담 그리고 열 명쯤 되는 남자들이 왔다. 간담은 오늘 예약된 손님이 없다며 공칠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남자들 중 몇몇은 게임을 하러 피시방에 간다고 하고는 가게를 나갔다. 모두가 대기룸에 앉아서 하릴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핸드폰이나 삐삐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매니저와 간담은 오늘 이차를 못 나간 민정이를 끼고 함께 양주를 마셨다.
새벽 4시가 다 돼서 갑자기 세 명의 여자가 왔다. 간담은 그중 짙은 검은색 마스카라를 칠한 여자에게 아는 척하며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고 반가워했다. 여자는 술에 잔뜩 취해놓고도 술 마실 곳이 없어서 오랜만에 왔노라고, 우리 담이 오빠 잘 있었냐며 미덥지 않은 안부 인사를 했다.
“숙희야, 잘 왔어. 오늘 왠지 얘들을 보내기 싫더라니. 자자, 5번 룸으로 들어가시고, 곧 선수들 대령해 올리겠습니다!”
간담은 여자들을 방으로 떠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피시방에 간 선수들을 호출했다. 나는 여자들을 위한 얼음과 물수건을 가져다 놓기 위해 노크를 하고 5번 룸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술에 잔뜩 취했던 여자는 180도 바뀐 낭랑한 목소리로 다른 두 명의 여자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고는 조용히 침묵했다. 잠시 뒤 숙희라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왔더니 웨이터도 갈아치우셨네. 여긴 웨이터도 얼굴 보고 뽑나 봐? 내 스타일인데? 이봐 오빠, 오빠는 오늘 안 바빠?”
“…….”
“오빠, 안 바쁘냐고. 안 바쁘면 나랑 놀래?”
“…….”
“뭐야, 지금 내 말 씹는 거야? 그럼 재미없을 줄 알아.”
“저건 또 뭐니, 재수 없게.”
다른 여자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야, 너 이제 이 방에 들어오지 마!”
나는 얼음과 물수건만을 놓고는 방을 나왔다. 숙희라는 여자는 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방을 나서자 등 뒤에서 대놓고 뭐라고 했고, 다른 두 명의 여자들도 한술 더 떠서 윽박질렀다. 잠시 뒤 선수들이 다급하게 대기룸으로 뛰어 들어왔다. 한 명 한 명씩 옷매무새를 다듬고, 멘트할 대사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초조함을 달래기도 했다. 간담은 지금 건수가 오늘 영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손님들에게 잘 보여야 매상을 올릴 수 있다며 잔뜩 힘을 줘 말했다.
“자, 오늘은 민수랑 상기 또… 양태랑 성욱이가 안 왔으니까 너희들이 잘해야 해. 오늘은 특별히 초이스할 때 옷을 벗어도 좋다. 니들끼리 너무 경쟁하지 않게 자제하라고 한 건데 오늘은 예외니까 알아서 잘해라. 자, 현수, 고성이, 영민이 먼저 들어가. 그다음에는 용욱이, 종수, 태현이, 그다음에는 철완, 홍도, 재형이다. 어서 준비해!”
선발대가 먼저 들어갔지만 잠시 뒤에 세 사람 모두 뺀찌만 먹고 돌아왔다. 고성이는 소개하면서 바지를 벗었던 모양인지 팬티 차림이었다. 잠시 후 그다음 조에서는 용욱이만 초이스됐고 두 사람은 리젝됐다. 마지막 팀을 남기고 겨우 한 사람만 초이스가 되자 다급해진 간담과 매니저는 5번 룸으로 들어갔다. 10여 분 뒤, 간담이 룸에서 나오더니 나를 불렀다.
“너 아까 손님들한테 뭐라고 했어?”
“…….”
“뭐야, 너 오늘 왜 그래? 대체 쟤들한테 뭐라고 한 거냐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근데 왜 쟤들이 널 찾는 거야?”
“네?”
“아까 서빙했던 웨이터 안 보내면 여기서 안 놀겠대. 아까 니가 그 방에 들어갔었잖아?”
“네….”
“얘네가 그래도 깨끗하게 노는 편인데 너 어쩌다가 찍혔어? 오늘 선수도 부족하니까 니가 대신 들어가. 너한테는 특별히 티씨는 안 띨 테니까.”
“그… 그래도….”
“철완이랑 홍도, 재형이는 준이랑 같이 들어간다. 준이 니가 초이스 되든 말든 난 모르니까 옷 갈아입고 들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세 사람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키지 않았으나 매니저까지 합세해 빨리 준비하라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다른 날보다 더 평범해서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던 하루였는데 너무 평범했던 것이,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 때문에 그리고 여자들 앞에 서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해서 맥박은 빨라졌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식은땀이 났다. 별일 아닐 텐데, 그냥 여자들이 장난하는 것으로만 끝날 텐데 왠지 불안했다. 초조함은 극도의 긴장과 자아의 집중, 아니 몰입의 상태를 만들어냈다.
옷을 갈아입고 철완이, 홍도, 재형이와 5번 룸 앞에 섰다. 재형이는 나를 보면서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얼굴을 보면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똑똑똑」
때마침 철완이가 노크했다.
“들어와.”
이미 룸 안에서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던 간담과 매니저가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 네 명은 차례대로 룸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을 때 아까 그 여자와 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난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 명이 하는 대로 테이블 앞에 섰다. 용욱이는 벌써 한 여자 옆에서 여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얘네들이 정말 마지막이야. 언니들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고 이쁘게 봐줘요. 알았지? 빨리 파트너 정해서 화끈하게 잘 놀자고. 내가 양주 한 병 쏠게.”
간담은 여자들에게 애원했다.
“철완이부터 소개해.”
매니저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은색 빛이 도는 양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세워 올린 철완이는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인사부터 했다.
“누나들 안녕하세요? 오디세이아의 간판선수이자 3년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철완입니다. 오늘 누님들을 편안히 잘 모시겠습니다.”
예상외로 평범한 인사였다. 철완이는 거친 욕을 항상 입에 달고 있었는데 그 말들이 자제돼 철완이 자체가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자, 다음.”
매니저 말이 떨어지자마자 홍도는 웃옷을 한 번에 벗었다. 근육질 몸매가 드러나자 여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홍도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몸과 어울리지 않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들, 이 근육 만져보고 싶지 않아? 얼마나 단단한지, 얼마나 탱탱한지 만져본 누나들만 알아요. 밤새 만질 수 있도록 오늘 밤만 특별히 허락하노라~ 하하하.”
울룩불룩한 가슴을 움직이면서 홍도는 여자들 앞으로 좀 더 다가갔다. 한 여자가 홍도의 오른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더니 좋다는 건지 징그럽다는 건지 비명을 한 번 지르고는 크게 웃었다.
“자, 자, 그만하고. 다음으로 재형이.”
키는 좀 작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재형은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상품권처럼 생긴 종이였다. 재형은 두 손으로 상품권을 보이면서 예의 그 감미로운 목소리로 여자들에게 말했다.
“누나들, 전 아직 여자 친구가 없어요. 여자 친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놀이동산에 놀러 가는 거예요. 여기 자유이용권 보이죠? 벌써 일 년째 제 품속에서 썩고만 있네요. 이렇게 가련한 저와 자유이용권을 구제해 주실 누님을 찾습니다. 오늘 저를 초이스한 누님과 하루 시간 내서 꼭 놀러 가고 싶어요. 그럼 저, 재형이 잊지 말고 꼭 초이스해 주세요!”
“어머, 낭만적이다. 나도 놀이동산 가고 싶은데.”
재형의 말이 끝나자마자 숙희라는 여자가 말했다.
“나도, 나도! 놀이동산 못 간 지 일 년도 넘었다.”
재형은 자유이용권을 셔츠 안주머니에 살짝 꽂더니 여자들에게 윙크를 해 보이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자, 마지막으로 오늘은 특별히 준이를 소개할까 하는데. 이 녀석은 별로 말도 없고 재밌지도 않다구. 손님들이 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자, 준이 네 소개 해.”
다시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손과 등에는 땀이 송송 배어 나왔고 목은 잠겨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간담과 매니저가 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 ‘어서’, ‘잘 좀 해봐’ 라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욕했던 여자들은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용욱이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했다.
온몸이 떨렸다. 다시 영겁의 순간이 현재로 흘러들었다. 모두가 숨을 멈췄고 모두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 정신만이 그 짧고도 긴 순간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말을 건네고 말을 받는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이 보인다. 테이블과 술잔들, 내가 날랐어야 할 안주가 담긴 접시들, 이미 뚜껑이 열린 탄산음료 캔들까지…. 모든 사물은 그 자리에서 정지해 다른 세계로 이탈한다.
정신은 무얼 하고 무얼 하지 말아야 할지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순간 숙희라는 여자의 눈이 깜빡거리자 이 깊은 정적이 깨졌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 눈은 빤히 내 쪽을 응시했다. 그 신호를 캐치한 나는 말을 꺼냈다.
“주… 준이라고 합니다. 잘 부… 부탁드려요.”
겨우, 그리고 간단하게 말을 끝냈다. 잠시의 침묵 뒤에 룸 안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다들 나를 응시했다. 마법에서 풀린 듯 그들은 이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준이 얘는 원래 웨이터로 일하는 녀석이야. 한 번도 현장에서 뛰어보지 않아서 잘 모를뿐더러 어리숙해서 이런 일은 적성에 안 맞는다구. 자, 얼굴 봤으면 됐잖아. 그치?”
간담은 숙희에게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숙희는 나를 계속 보고 있다가 간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담의 지시로 우리는 대기실로 갔다. 잠시 후 간담은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저년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 야, 준이랑 재형이 들어가.”
간담은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듯 말하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 저요?”
“그래, 잔말 말고 들어가. 비위 좀 맞추다가 끝내면 될 거야. 애들이 하는 대로 눈치껏 알아서 따라 하고. 술 너무 먹진 말고. 알았지? 니 파트너는 숙희야.”
“그렇지만 저는 그냥….”
“아, 이젠 진짜 몰라. 니가 저지른 일이 있으니까 저것들이 끝까지 저러는 거 아냐! 니가 책임져! 빨리 들어가!”
간담은 손사래 치며 말했다. 간담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재형이와 함께 룸에 들어서니 이미 조명은 어두워진 상태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욱이와 파트너가 서로 껴안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두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고 맞장구를 쳤던 여자가 재형이를 불렀다. 작은 키에 조금은 통통한 몸매, 그리고 단발의 머리를 한 여자는 반가운 얼굴을 지으며 재형이를 옆에 앉혔다.
숙희라고 했던 여자는 나를 보더니 손짓을 한 번 했다. 내가 문 앞에 계속 서 있자 한 번 더 손짓하고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노래를 부르는 커플 옆을 지나 숙희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내가 인심 쓴 줄 알아!”
노랫소리 때문인지 여자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숙희는 커플을 자리에 앉혔다.
“인사들 좀 하게 조용히 해 봐.”
벌써 친해진 듯 두 커플은 각자 자리에 앉아 손을 잡거나 허리를 감싼 자세로 이야기했다. 숙희라는 여자와 나는 아무런 접촉 없이 앉아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야 할 거 아니야. 자꾸 이러면 파트너 바꾼다.”
“…….”
“뭐야, 왜 그러는데? 나한테 화났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적응이 안 돼서요.”
“얘 하는 말 들었어? 깔깔깔.”
“이봐, 너 준이라고 했지? 숙희한테 잘 보여야 해. 오늘 물주라고.” 용욱이를 껴안은 여자가 말했다.
“아무래도 술을 한잔해야 말을 꺼낼 건가 봐. 자, 한 잔 받아.”
숙희는 내게 맥주를 따랐다. 두 손으로 정중히 술을 따랐는데 마치 내가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투명한 컵은 효모가 적당히 발효된 금빛으로 가득 찼다. 숙희는 자기 잔에도 술을 따르더니 내게 러브 샷을 제안했다.
“이미 들었다시피 내 이름은 숙희야. 오늘은 내가 니 주인이라고. 그만 어색해하고 우리, 오늘을 기념하면서 한잔하자!”
숙희는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내 목 뒤로 돌리면서 나를 가볍게 안았다. 나도 잔을 들어 숙희를 왼쪽에 두고 술을 마셨다. 커다란 가슴이 닿았다. 숙희의 가슴과 겨드랑이, 목덜미에서는 바다의 짠 내음이 풍겼다. 겐조 뿌르 옴므향과 닮았다. 숙희와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천천히 잔을 비웠다. 엉켰던 몸은 살짝 풀렸고, 우리 둘은 만족한다는 듯 기분 좋게 쳐다봤다.
“이야, 잘 마시네? 난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좋더라. 자, 한잔 더 받아.”
숙희는 손에 있던 담배를 입에 물고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내게 한잔 더 따랐다.
“얘는 미진이, 얘는 나영이야. 이년은 팔자 늘어진 대학생이고 나영이는 조그만 옷가게를 해. 다들 나랑은 고등학교 동창.”
용욱의 파트너인 미진이와 재형의 파트너 나영이는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도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나저나 넌 몇 살이야?”
“21살.”
나는 짧게, 거짓말했다.
“우린 모두 24살. 우리가 누나네? 오늘 우리 잘 모셔야 해. 알았지?”
숙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철이가 양주와 화채, 얼음을 들고 왔다. 상철이는 나를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괜찮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시바스 리갈이네? 이거 니가 시켰지? 난 딤플 마시고 싶은데!”
“오늘은 그냥 마셔. 니가 쏘는 것도 아니면서.”
숙희가 말했다.
“난 딤플만 먹는단 말야. 반년 만에 만나서 겨우 이렇게 대접하기야?” 나영이는 끝까지 요구를 관철하려 했다.
“알았어. 야, 니가 웨이터니까 잘 알겠다. 여기 양주 괜찮은 거지? 뭐 담이 오빠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우린 물 타거나 그러지 않아요. 남은 것들을 섞지도 않고. 안심해도 돼요.”
나는 또 한 번 거짓으로 대답했다.
“음… 저기, 여기 딤플 중간 짜리로 하나 더 주고 튀김 안주 좀 더 해 줘요.” 숙희는 임시 웨이터 상철에게 최대한 공손히 말했다.
상철이는 나가면서 음악을 틀었다. 룸의 양쪽 천장에 매달린 구형 스피커에서는 빠른 템포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경쾌하면서도 살짝은 우울한 단음계의 곡이었다.
“나 이 노래 알아. 모던 하켓의 ‘캔트 테이크 마이 아이스 오프 유’라는 곡이잖아.” 미진이는 발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무슨 뜻인데?”
용욱이가 미진이에게 술을 따르며 물었다.
“직역하면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는 뜻쯤 되겠지.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됐다는 노래야. 이래 봬도 영문과 4학년이라구.”
미진이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파트너 용욱이도 술을 마시면서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기분을 맞추고 있었다. 재형이와 나영이는 조용히 속삭이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숙희와 나만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안 한 채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음악은 계속 반복됐다.
“어우, 대학생이라 좋겠다, 쌍년아.”
재형이와 속삭이던 나영이는 한참 뒤에야 속이 뒤틀린다는 듯 말했다.
“니도 억울하면 대학에 가라구. 옷 팔아서 돈 얼마나 번다고 그래? 안 그래, 자기?” 미진이는 용욱이에게 안기면서 자기 말에 긍정하라는 듯 눈치를 줬다.
“야, 넌 우리보다도 공부를 못했잖아. 대학도 저 한참 밑에 있는 경상도로 다니는 주제에 참 말도 많다.”
“낄낄낄, 그래도 대학은 대학이라구. 잘 생긴 놈들도 많지, 집안 빵빵한 놈들도 많지. 우리 같은 년들이 언제 그런 놈들 따먹겠어?”
“조오켔다. 쌍년아. 그런 새끼들 많이 따먹고 체나 해라. 아, 재미없어. 야, 우리 게임하자.”
“게임은 무슨, 난 노래나 부를래. 얘네들 너무 분위기 못 맞추잖아.”
숙희는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음악을 끄고 노래 기계를 켰다. 노래 번호가 적힌 책자를 보지도 않고 기계에 번호를 입력했다. 마이크를 잡더니 우리 쪽을 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조잡한 빛을 냈다. 왼쪽 허벅지부터 단이 터진, 허벅지와 엉덩이에 꽉 끼는 긴 맥시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섹시해 보였다. 아름답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섹시하다는 말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죽도록 너만 사랑하는데 왜 날 믿지 못하니, 나는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해.”
조용한 반주에 맞춰 숙희가 애절한 목소리로 한 소절을 부르자 노래는 180도 반전하며 빠른 템포로 변했다. 곡이 빠르게 진행되자 용욱이와 재형이가 탬버린을 들고는 소리를 지르며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췄다. 나영이도 재형이 옆으로 가서 괴성을 지르며 함께 춤을 췄다. 미진이는 자리에 앉아 재밌다는 듯 그들을 쳐다봤다.
“섹시한 당신은 나의 남자, 잘 생긴 당신은 나의 남자, 이 세상 마지막이 온대도 영원히 이 환상에 젖을래. 잘 뻗은 당신은 나의 남자.”
노래에 맞춰 용욱이와 재형이는 “섹시”라며 추임새를 넣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했다. 미진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용욱이와 함께 몸을 바짝 붙인 채 춤을 췄다. 나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숙희는 내 쪽을 쳐다보며 손짓하며 노래를 계속했다.
“걱정하지 마, 너의 고민이 뭔지 이미 난 다 알고 있어, 아무 일 없어 지난 사랑과 추억도 없었어!”
사랑과 추억도 없다는 가사에서 숙희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입고 있던 빨간색 블라우스를 벗어 내 쪽으로 던졌다.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블라우스에서 숙희의 몸에 밴 향기가 전해졌다. 짙은 자주색 브래지어가 보였다. 동시에 숙희의 커다란 가슴도 일부 드러났다. 벗겨진 숙희 어깨는 상당히 넓었지만 허리는 잘록했다. 숙희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죽도록 너만 사랑하는데 왜 날 믿지 못하니, 나는 죽을 때까지 너 하나 뿐야, 아니야 난 죽는다 해도 너 뿐야, 그러니 제발 마음 열어 나를 믿으며 사랑해.”
1절이 끝나고 간주가 흐르자 숙희는 박자에 맞춰 탬버린을 치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간주 중간에 용욱이는 다른 마이크를 쥐고 능숙하게 랩을 했다. 미진이는 그 모습이 웃긴다는 듯 춤을 추다 말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숙희는 내 손에서 탬버린을 뺏어 의자 위로 던지고는 나를 끌고 앞으로 나갔다. 나는 숙희 옆에서 몸을 가볍게 흔들며 어색하게 분위기를 맞췄다.
한 손에 맥주병을 쥐고 춤을 추는 나영이는 파트너 재형이에게 맥주를 억지로 마시게 했다. 춤을 추던 재형이는 병째 마셨는데 당연히 전부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맥주가 재형의 셔츠 위로 흐르자 나영이는 입을 갖다 대 재형이의 입술과 목덜미를 핥았다. 그러고는 셔츠를 억지로 벗기고는 두 팔을 벌려 껴안았다.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됐다. 짙은 음색이면서도 콧소리가 간혹 튀어나오는 묘한 음성을 가진 숙희는 빠른 템포의 노래를 흐느적거리며 불렀다.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 걸친 채 허리와 엉덩이를 천천히 움직였다. 용욱이의 랩 부분이 지나고 다시 후렴이 반복될 때였다. 숙희는 서서 몸을 흔들고 있는 나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몸을 돌리고 무릎을 살짝 굽히면서 엉덩이를 내 성기 부분에 갖다 댔다. 숙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힐끗 보며 미소 짓고는 상하로 그리고 좌우로 엉덩이를 들이대며 비비적댔다. 몸과 밀접한 옷 때문에 엉덩이의 풍만한 살집이 그대로 전해졌고 페니스는 발기했다. 무언가를 감지한 듯 숙희는 엉덩이를 더욱 격렬하게 그러면서도 깊게 내 그것에 비벼댔다. 검은색 바지 위로 솟아오른 그것 때문에 나는 곧 민망해졌고 살짝 떨어지려고 하자 숙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서로의 몸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내 몸을 더 가까이 당겨 그 느낌을 강하게 몰았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환호했다. 숙희는 숨을 고르고 맥주를 따라 마셨다. 잠시 뒤 이번에는 재형이가 조용한 발라드풍의 곡을 선곡해 불렀다. 모두 다시 자연스럽게 파트너와 짝을 지어 나와 서로를 껴안았다. 숙희는 내 손을 당겨 자신의 허리에 고정하고 나를 살짝 안은 자세를 취했다. 몸을 움직이면서 숙희의 가슴이 닿았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자 숙희는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갖다 대며 내 눈을 응시했다. 재형의 노래에 몸을 흔들면서 일부러 가슴을 비벼대기도 하고 내 엉덩이를 살짝 잡아끌어 서로의 성기를 맞닿게 했다. 아직 늦가을이라 그다지 춥지 않아 난방을 켜지 않았는데도 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열심히 춤을 추며 즐기고 있는 숙희 이마에도 작은 땀방울들이 보였다.
주문한 양주와 안주를 놓고 간 상철이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평생 이렇게 놀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된 서로의 몸을 탐닉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묘하게 끄집어냈고, 서로를 언제든지 비웃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우리는 같은 공간에 뒤섞여 있었다.
재형이의 노래가 끝나자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나영이는 재형에게 손수 맥주를 따라주면서 러브샷을 권했고, 그 커플은 모두의 환호 속에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이번엔 재형이가 나영에게 안주 삼아 사과 한 쪽을 먹여주고는 자기도 사과 한 쪽을 먹었다.
“아, 시원하다. 오늘따라 맥주가 잘 받는데?”
나영이가 말했다.
“그래? 야, 아무튼 이제 좀 분위기 산다. 이제 니가 노래 부를 차례야. 얘 완전 귀여운 거 알아? 깔깔깔. 넌 노래 잘 해? 흥 깨지 말고 잘 좀 해봐.”
지목당한 내가 노래하기 위해 일어서자 숙희도 따라 일어섰다. 숙희는 내 볼을 살짝 꼬집고 엉덩이를 툭툭 치고 나서는 내 옆에 섰다. 딱히 할 노래가 없었다. 좋아하는 노래들이라고는 이런 분위기에 전혀 맞지 않거나 가사가 없는 하드 록이나 메탈, 뉴웨이브 계열의 테크노 음악들이었다. 갑자기 어떤 노래 제목이 떠오르면서 지금의 이들에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8372.’ 제목은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라는 모노크롬 노래였다. 요즘 유행하는 빠른 템포의 트립합 계열 곡이지만, 일부 마니아들만 좋아한다는 것이 늘 문제였다.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그냥 되는 대로 사니.”
내가 노래를 부르자 다들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췄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안 맞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생소한 비트에 몸이 따라오질 못했고, 가사는 직설적인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터라 호응이 없었다. 어색할 뿐이었다. 반복되는 기계음과 기타 루프, 주문을 외는 듯한 가사의 반복은 어색한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 나이를 퍼먹도록 그것 하나 몰라! 이거 아니면 죽음, 이거 아니면 끝장, 진짜, 니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그런,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
간주 부분에서 그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그러면서도 억지로 분위기를 놓지 않으려는 듯 끝까지 어색하게 춤을 췄다. 숙희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여전히 몸을 비벼대면서도 이런 상황이 우습다는 듯 가끔 크게 웃었다.
아니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하는, 오래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는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직선적이고,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특권을 가진 젊은이들이 안 어울리게도, 전혀 그럴 것이 아닌 일인데도 서로 눈치를 보고 하기 싫은 무언가를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애들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다. 단지 어색하게 어른의 방황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다. 방황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상처를 주고받는 동시적 행위를 즐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야말로 아마도 천국에 있는 존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른의 모습도 가지지 않고, 아이의 모습도 가지지 않은, 말 그대로 새로운 육체를 가진 정신들이야말로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울리지 않는 춤을 끝까지 추며 즐기려는 그들을 보면서 숨이 막혔다. 결국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중간에 스탑 버튼을 눌러 음악을 꺼버렸다.
“왜 그래? 좋은데….”
갑작스런 적막에 숙희가 따졌다. 용욱이도 옆에서 난색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노래가 별로인 것 같아서….”
“그래? 난 좋았는데. 아무튼 너도 한잔해.”
숙희는 내게 맥주를 따라주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자고 청했다. 여자들 셋이서 함께 화장실로 가고 나서야 용욱이는 나와 재형이를 데리고 대기룸으로 갔다. 용욱이는 담배를 하나 물어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근데 왜 갑자기 음악을 끈 거야?”
“노래가 영 어색해서.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도 중간에 제멋대로 하면 곤란해. 여기도 하나의 사회라구. 룰이 있고 지켜야 할 매너가 있는 거야.”
옆에 있던 재형이가 마치 다른 사람 대하듯 말했다. 타이르는 듯한 말투 때문에 순간 발끈했지만, 나는 조용히 생각을 말해야 했다.
“모르는 건 아닌데 그때는 음악을 끄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매너였다구.”
“그럼 노래를 하지 말던가.”
이제는 짜증이 난다는 듯 재형이는 시비조로 대답했다.
“지나간 일은 그만두고. 아무튼 준이는 잘하고 있는데 말이 너무 없어. 그래도 뭐 그 정도면 비위도 잘 맞추는 편이야. 그대로만 하면 돼.”
용욱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씨팔! 나영이란 년 은근히 진상 끼가 있어서 짜증 나잖아.”
재형이는 나영이 때문에 모든 게 짜증 난다는 듯 말했다.
“그 정도면 애교로 봐줄 만해. 준이, 넌 괜찮아?”
“응….”
“긴장하지 말고 아까 한 것처럼만 하면 돼. 재형이 넌 너무 싫은 티 내지 마. 좀만 참으면 되잖아? 자, 들어가자.”
용욱이는 이 일에서는 선배라고 생각해서인지 초짜인 나를 신경 써주고 재형이를 다독이고는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장 룸으로 들어갔지만, 재형이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여자들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재형이는?”
나영이가 물었다.
“잠깐 화장실 들렀다가 온다네요. 자, 누님들, 우리 무슨 게임할까?”
용욱이가 다시 분위기를 띄우면서 여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진실 게임하자. 벌칙은 옷 하나씩 벗기!”
갑자기 신난다는 듯 나영이는 들뜬 목소리로 제안했다.
“맨날 똑같은 짓거리 중에 그나마 그게 제일 재밌더라.”
미진이가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난 좀 쉴래. 어지러워. 야, 너 일루와. 다리 베게 해 줘.”
숙희는 나를 불렀다. 나는 일자로 누운 숙희에게 오른다리 하나를 빌려줬다. 숙희는 내 허벅지 위로 머리를 눕히면서 말을 걸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 눈동자를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그러자 수많은 과거와 머릿속 상념들이 눈빛을 거쳐 오가기 시작했다.
“넌 왜 이런 일 해?”
“돈… 때문에요. 일자리를 못 구해서.”
“하긴, 요즘 어딜 가도 이런 돈벌이 구하기 힘들겠지.”
“꼭 그런 건 아니고…”
“아까 갑자기 불러서 당황했지? 처음에 기억나? 왜 나한테 말도 안 한 거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 이유 참 대단하네. 그나저나 말 편하게 할 수 없어? 괜찮으니까 말 놔. 그래야 서로 더 가까워지잖아.”
“그래도 누나잖아요. 손님이고….”
“난 누나라는 말 싫어. 숙희라고 해. 본명은 진아니까 그냥 진아야 하고 불러.”
순간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또 진아였다. 진아라는 이름은 이토록 흔한 것일까. 그런 이름은 하나인 줄만 알았다. 진아가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워놓는다. 같은 이름은 왜 곁을 맴돌기만 하는 것일까.
“왜 그래? 내 이름이 촌스러운가?”
“아니, 예전에 알던 친구 이름도 진아라서.”
“그으래? 깊은 관계였나 보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말을 너무 돌려서 하는걸? 솔직하면 어때서? 솔직한 건 좋은 거잖아.”
피곤하다면서 내 다리를 베고 누운 여자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더니 진아라고 하는 숙희는 갑자기 기침했다.
“콜록콜록, 카악 퉷.”
누구든, 그 사람이 신이 된 프시케와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여신이든, 추한 것 앞에서 그 아름다움은 잠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더러운 것, 추한 것, 피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우리 본성상 감출 수 없을 만큼 상식적인 것이다. 솔직한 것이 좋은 거라던 숙희는 기침 후에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끓던 가래를 바닥에 뱉고서는 담배를 물어 피웠다. 그녀의 왼쪽 뺨과 입 주위로 튄 색깔 있는 침이 신경 쓰였다. 나는 왼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 흔적을 닦았다.
“고마워. 너는 은근히 매너가 있어 좋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있었어.”
“왜 나를 초이스 했어요?”
내가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왜 했을 거 같아?”
숙희는 담배를 몇 모금 빨다 말고 이젠 정말 지쳤다는 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 정면에서, 그것도 한동안 눈을 감은 여자 얼굴을 볼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어쩌면 그 여자와 섹스할 때뿐이다. 섹스할 때 그 여자의 진정, 영혼은 감은 두 눈을 통해 전달된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은 여자를 견딜 수 없었다. 아름다운 그 어떤 여자도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면 그렇게 추해 보일 수 없었다.
“대답을 안 하니까 괘씸해서?”
눈을 감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잠시 뒤 숙희의 감은 눈은 씰룩거리더니 입에서 터진 웃음과 함께 크게 떠졌다.
“하하하, 웃기지 좀 마. 나 피곤하다니까. 알아서 생각해.”
“대답 좀 해줘요. 궁금하잖아.”
이제는 내가 숙희에게 안기는 꼴이 됐다.
“대답하면 뭐 해 줄 건데?”
“에이, 대답만 해 주면 되는 걸….”
“일단 한잔 더 따라봐. 폭탄으로.”
나는 누워있는 숙희 얼굴에 술이 튀지 않게 조심하면서 술을 섞었다. 잔을 들고 그녀에게 준비가 됐다는 시늉을 하자 숙희가 말했다.
“반만 마셔. 그리고 나한테 키스해.”
“네?”
“마시지 말고 나한테 넘기라고. 그럼 대답할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숙희는 내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내가 목마르다고!”
갈증을 느끼지 않는데도 목마르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화 있을진저. 나는 대답을 듣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술을 들이켰다. 쓰지도 달지도 않는 액체의 맛이 전해졌고, 목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생겼고, 이제는 키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몰려왔다. 나는 허리를 굽혀 누워 있는 숙희의 입에 내 입을 가져갔다.
“이야, 저것들 재밌게 노네? 얼씨구, 잘한다.”
나영의 목소리가 들렸고, 모두의 시선이 우릴 향해 있다는 느낌이 들자 얼른 입을 떼고 싶어졌다. 하지만 숙희는 얌전히 내 술을 받아먹고는 혀를 내밀어 입안 곳곳을 헤집었다. 남은 액체 한 방울이라도 다 뜯어먹어야 목마름이 풀릴 것 같다는 듯. 신이 권하는 넥타르를 받아먹는 탐욕스러운 인간도 그렇게까지 게걸스럽지는 못할 것이다.
“맛있는걸. 시원해.”
“빨리 대답해줘요.”
“알았다구. 글쎄,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인연이라는 게 있잖아? 그냥 처음 봤을 때 포스가 느껴졌어. 아, 저런 놈이랑 뭘 하면서 놀까? 그런 생각 정도? 깔깔.”
“…….”
“뭐야,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인연이라는 게 뭐 대단할 거 같아?”
“그런 건 아니야.”
“아 몰라. 끅. 난 이제 진짜로 쉴 거야.”
피곤하다며 다시 내 다리를 베고 누운 숙희는 눈만 감았을 뿐, 모두가 술에 취해 서로의 귀에 대도 말을 하고 있을 때 은밀히 한 손을 내밀어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손은 마치 죽어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천천히, 다섯 개의 촉수를 움직여 내 허리부터 좀먹기 시작했다. 가장 큰 하나의 촉수가 옆구리를 살짝, 욕정의 힘이 느껴질 만큼 강하게 누르고는 나머지 네 촉수를 뻗쳐서 쓰다듬는다. 미안하다는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지불할 돈에 대한 권리를 이렇게 찾겠다는 듯. 처음에 나는 흠칫 놀라 움츠렸지만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술에 취해 각자 떠들고 헤프게 웃고 상대하는 모습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번갈아 가며 그들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자니 옆구리와 등 뒤쪽부터 전해져 오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의 이야기에 모두가 주인공인 그 성스러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숙희는 눈을 감은 채로 서서히 무언가를 느끼는 듯했다. 마치 혼자 수음하는 소녀처럼 성스러운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찾아온 쾌락에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밀려든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렸더니 용욱이와 눈이 마주쳤다. 미진이는 두 팔로 용욱이의 목을 감싸고 한쪽 다리를 용욱의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이미 반쯤 남자의 위를 올라탄 형세였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한 용욱이는 턱으로 숙희를 가리키며 ‘준이, 너도 참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숙희는 내 손을 잡아 이끌더니 자기 배에 얹어놓고는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술에 가득 취한 나영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벗어! 니들도 돈 먹은 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이딴 시시한 게임 집어치우고 좀 화끈하게 놀아 보자구! 끄윽. 니부터 벗어 봐.”
나영이는 재형이를 강제로 떠밀다시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재형이는 이미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 허리띠를 풀면서 말했다.
“하나 벗을 때마다 팁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누님 데리고 놀러 가지.”
“가긴 어딜 가. 놀이동산 좋아하네. 나도 메인 몸이라구.”
“에이, 그래도 하루 휴가 내서 같이 바람도 쐬면 좋잖아?”
재형이는 마지막까지 부드럽게,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내가 니들 먹여 살릴 만큼 돈 많아 보이든? 여기서 즐기고 나면 끝 아냐? 그러니까 빨리 까고 보이기나 해 봐. 쓸만하면 여기서 먹어주면 될 거 아냐!”
나영이는 솔직했다. 자신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좋지 못한 결과를 보여줄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용욱이가 재형이를 가로막으며 일어섰다.
“누나들, 우리 그만 해요. 이제 아침도 다 됐는데 나가서 해장술이나 한잔합시다. 내가 좋은 데 알….”
「퍽!」
“아악!”
나영이는 재형이를 가로막은 용욱이 머리 위에 맥주병을 내리꽂았다. 갈색 파편은 사방으로 튀었고, 용욱이는 머리를 움켜쥐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영의 손에서는 깨진 병 위로 남은 맥주 거품이 솟구쳤다. 그걸 본 미진이는 짧고 강렬하게 비명을 질렀다. 누워서 내 몸을 쓰다듬던 숙희는 번개같이 튕겨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이 미친년아!”
“짜증 나잖아!!!”
엄청난 고음의 목소리가 가늘고 길게 룸 전체를 울렸다. 나영이는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뒤 간담과 매니저, 상철이가 뛰어 들어왔다. 간담은 룸 안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는커녕 무표정하게 용욱이를 데리고 나갔고, 매니저는 우리를 대기실로 보냈다.
“야, 어디가? 이 새끼들아, 돈 안 받아?”
룸을 나가려는데 술에 취한 나영이의 목소리가 우리를 붙잡았다. 재형이와 나는 매니저를 쳐다봤고,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대기실로 가라는 고갯짓을 했다. 시간은 이미 아침 7시가 넘었다. 다른 선수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는지 대기실은 비어 있었다.
“미친년들. 완전 진상이야. 그럴 줄 알았어.”
“휴….”
“준이, 넌 괜찮아?”
“응, 너는?”
“난 뭐 맨날 겪는걸. 오늘은 웬일로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그나저나 저것들 팁은 주고 가야 하는데.”
재형이는 이 와중에도 돈을 걱정했다.
“용욱이는 어떻게 됐을까?”
“먼저 퇴근할 거야. 약국 가서 붕대나 감아야지 뭐. 있다가 숙소에 가서 보면 돼.”
“숙소?”
“대방동에 있어. 준이는 안 가봤지?”
“응.”
“가볼래?”
“아, 아니. 괜찮아. 나중에 가지 뭐.”
밖에서 구두가 딸각거리더니 숙희가 술값을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오빠. 뭐가 이렇게 비싸? 우리가 호구로 보여?”
“야, 그래도 양주 서비스 줬잖니. 아까 걔도 병원비 보태야 하고.”
“그건 이년한테 받아. 나는 이거 다 못내.”
“알았어, 알았어. 좀 디시할 테니까 오늘은 봐주라.”
잠시 뒤 술값으로 실랑이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여자들은 이제 영영 가 버린 것 같았다. 매니저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야, 아무튼 수고했어. 용욱이는 담이랑 숙소로 먼저 갔다. 자, 여기 8만 원. 10만 원에서 2만 원은 우리 몫이야. 세어 봐.”
그사이 철저하게 계산을 마친 매니저는 재형이와 내게 8만 원씩 던져줬다.
“준이 넌 어때? 집으로 바로 갈 거야?”
“네, 그만 가 봐야죠.”
“알았어. 저녁에는 나올 거지?”
“네….”
“오늘 니가 처음부터 저것들 안 긁었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 아냐. 아무튼 가봐.”
“네, 저녁에 뵙겠습니다.”
나는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여 누군가에게 인사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다음 호에 계속>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 판 일 : 2017.12.20 ⓒ KRJ
본 사이트의 모든 내용에 대한 저작권은 (주)레이싱미디어(경마문화)에 있으며 관련내용을 무단 복제, 배포시 법적 제재를 받습니다.
이 기사에대한 독자소리는 0 건입니다

다   음   글 [일몰의 시작 #29] 즐거운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전   글 [일몰의 시작 #27] “왜 그래? 나보다 쿨한 사람 아녔어?”
     
  현재 글자수 0 byte / 최대 4000 byte (한글200자, 영문4000자)
 
SPONSORED
→ 취재기자
→ 문학산책
→ 서석훈의 All About 경마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