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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몰의 시작 #29] 즐거운 일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섹스는 나쁜 감정을 순화시키고 적을 동지로 만들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우리는 사이좋게 주사를 놓고 음악도 나누고 비싼 와인과 철 아닌 과일을 즐기며 서로를 나누었다. 성찬의 연속이었다.
‘빵, 빵’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는데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길가로 비켜 뒤를 돌아봤다. 하얀색 신형 그랜저가 내 앞으로 왔다. 진하게 선팅을 한 운전석 창문이 열리면서 숙희의 얼굴이 위로부터 드러났다. 바로 전까지 옆에 있던 목소리가 다시 찾았다.
“집에 가?”
눈이 마주치자 숙희는 생기를 되찾은 톤으로 물으며 나를 응시했다.
“네.”
“어딘데?”
“신설동 근처예요.”
“그래? 나도 그 방향인데, 일단 타. 춥잖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차에 올라탔다. 왜 그 차를 타게 됐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숙희는 능숙하게 운전했다. 아침 출근길이라 차가 서서히 막히자 숙희는 한남대교를 지나 약수동 쪽으로 방향을 틀고는 “저쪽으로 가면 차가 많이 막히잖아”라고 말했다.
“그나저나 혼자 살아? 왜 애들하고 숙소에서 안 사는데?”
“일한 지 얼마 안 되거든요. 원래 살던 집도 있고.”
“오늘 나랑 같이 있을래?”
갑작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숙희는 어색한 부탁 혹은 강요를 했다.
“…….”
“왜, 싫어? 이차 나가는 거로 생각하지 말고. 나도 오빠들한테 별말 안 할 테니까. 그냥 혼자 자기 싫어서 그래.”
진아가 떠난 뒤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홀로움’이었다. 살을 섞을 여자가 곁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혼자 있으면서 생기는 단순한 외로움이나 고독감보다 잔인했던 것은 혼자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심지어 미루가 함께 있었어도 혼자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텔레비전을 보거나 혼자 버스를 타고 갈 때나 혼자 잠들 때 홀로움은 결코 오지 않았다. 과거를 회상할 때 내가 지금 혼자라는 사실이 자각되는 순간에,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밀려오는 처절한 느낌. 그것이 바로 홀로움이다. 이 감정은 일종의 나긋하고 느긋한 느낌까지 함께 몰고 왔다. 감정에 싸구려 따윈 없다. 단지 싸구려 인생인 누군가에게 넘어간, 얼굴이 반반하거나 돈이 많거나 우울해하는 그런 여자가 싸구려일 뿐이다. 반대로 나는 외로움에 적응하면서 안도의 마음이 들 때 견딜 수 없었다. 숙희는 그 감정을 단지 ‘혼자 자기 싫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아뇨. 상관없어요. 나도 오늘은 집에 가기 싫었어.”
적당한 핑계를 둘러댔다. 오늘은 무언가를 하기 싫다, 오늘은 무얼 하고 싶다는 순간의 감정 표현은 실로 적절한 핑계를 꾸미기에 알맞은 말이다.
“좋아, 그러면 우리 집으로 간다.”
숙희는 약간 상기됐는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차는 동대문을 지나 혜화동 쪽으로 향했다. 나는 어느 집이든 빨리 들어가서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혜화 사거리에서 성대 입구 쪽으로 방향을 돌린 차는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지어졌는지 매우 깨끗한 빌딩이었다. 지하에 차를 대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위쪽은 전부 오피스텔이고, 내 방은 8층이야.”
8층 버튼을 누르고 숙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봤다. 나는 그녀 뒤에 서서 뒷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룸에서 봤던 맥시스커트가 여기서는 단정해 보였다. 하지만 깡마른 체형은 아닌 숙희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꼭 옥좼고, 밝은 불빛 아래에 있으니 스커트라인 안쪽 속옷 윤곽까지 드러났다.
만만치 않은 이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왼쪽으로 조금 못 가서 808호 앞에 선 숙희는 현관문 옆에 놓인 화분 아래에서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차 키랑 달리 집 키는 잘 잃어버리거든.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도어락은 싫구…. 자, 들어와.”
시간은 벌써 아침 9시가 다 됐다. 쌀쌀한 바람과 달리 이른 아침 햇볕은 무척이나 밝고 따가웠는데 20여 평 정도 되는 오피스텔은 이 모든 빛을 받아들였다. 공중에 떠도는 미세한 먼지까지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햇볕은 따갑고 강렬해서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인데 옆 그늘은 반대라서 두꺼운 점퍼라도 필요해진다면, 이 차가운 바람이 양지바른 곳이나 그늘진 곳에서나 똑같이 부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무 데나 앉아. 커피 마실래? 아니면 주스?”
숙희는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소파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커피 마실게요.”
“우리 집엔 원두밖에 없어. 설탕만 타면 되지?”
“응.”
숙희는 냉동실에서 이미 갈아놓은 원두 가루를 꺼내 커피 메이커에 올려놓고 생수를 붓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혼자 살기에는 커 보이는 거실에는 커다란 냉장고와 50인치는 족히 넘을 듯한 텔레비전, 자줏빛의 커다란 소파가 전부였다. 소파 옆에는 커다란 곰 인형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있었다. 숙희는 내게 커피를 주고 자신은 냉장고에서 초록색 하이네켄 병을 꺼내 홀짝였다. 시선은 이산가족을 찾는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있으면서 한 손에는 맥주를 다른 한 손으로는 스커트를 벗었다.
“나 스커트 지퍼 좀 내려줘. 돌리기 귀찮아.”
몸을 돌린 숙희는 그 자극적인 뒷모습을 내게 들이밀었다.
“아까 그랬다고 딴생각하지 마.”
숙희는 한 손으로 마저 스커트를 벗고는 욕실로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꾸할 필요도, 대답할 말도 없었기에 나는 시선을 텔레비전에 고정했다.
여자들 대다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샤워한다. 남자들보다 더 많은 분비물을 쏟아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욕실에서 낭비하는 물과 시간과 함께 그녀들의 머릿속에서는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닐까. 수도꼭지 맨 위에서 무조건적 반응에 따라 순수함을 꽃피우지 못하고 시궁창 속으로 뛰어든 용기의 물 입체들, 처음부터 아무것에도 닿지 못하고 저 심연 아래로 그대로 흐르는 물의 소리, 그녀의 곡선을 따라 내리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 흐름을 거부하고 바닥으로 투기하는 물의 투신이 그려졌고, 보였다. 그렇게 많은 역사를 내동댕이치고서 한참 뒤에야 숙희는 젖은 머리를 털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뇌를 비우고, 어떤 생각들이 몰아치기를 기다렸던 나는 이러다가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씻어야지. 난 옷 갈아입고 잘게.”
숙희의 음성이 들리자 곧 제정신이 돌아왔다.
커다란 타월을 몸 전체에 휘두른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입술은 메말랐으나 온기는 남아 있는 듯 보였고, 눈두덩 위로 얇은 막처럼 퍼진 몇 안 되는 생생한 눈썹들은 솟아오른 지평이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숙희는 방에서 이불과 베개 하나씩 꺼내 소파에 던져두고는 문을 잠그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나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티와 팬티만을 입은 채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는 순간 꿈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기억하는 존재인 우리일지라도 꿈을 잊어버리기는 쉽다. 그 순간이 그랬다. 눈을 떴을 때 진아가 내 곁에서 아른거렸는데, 그 순간 거실 바닥에 누워 있는 숙희 모습에 놀라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왜 그래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엔 소리 없는 미소를 커다랗게 그리고 있었다. 숙희는 눈을 뜰 생각도, 몸을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괘… 괜찮은 거야?”
어깨를 흔들었지만 깨어난 건 두 가슴뿐이었다. 팬티 하나만 입은 채 거실에 누워 있는 여자의 그림은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른손 끝에는 주사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지에 아직 그 끝이 살짝 걸려 있었고 바늘 끝에는 조금 탁한 액체 방울이 묻어 있었다.
“일어나봐, 왜 그래?”
나는 왠지 부아가 치밀었다. 막 시작하려는 꿈을 깬 것도 모자라 그녀 혼자 달콤한 무언가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우리는 목숨을 걸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나는 뺨을 때리기도 하고 몸을 심하게 흔들어 숙희를 깨워보려고 했다.
“와이… 왜….”
떠진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동공은 작았다. 입이 말랐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시려고 했으나 혀는 마른 입술에 매달리고 말았다.
“물… 물 좀 줘….”
누운 채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냉장고를 열었다. 물은 없었고 맥주 캔과 와인 몇 병만이 있을 뿐이다. 컵 하나를 들고 싱크대에서 물을 받았다. 숙희의 널브러진 머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입술에 컵을 댔다. 물이 흘렀다. 물은 그녀의 입 주변의 굴곡을 따라 흐르며 목까지 내려갔다. 입으로 들어간 물도 역류했다. 나는 숙희를 그대로 다시 바닥에 눕혔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하… 이번엔 위험했어…. 욱!”
한참 뒤 스스로 일어선 숙희는 한마디 말을 내뱉고는 헛구역질이 나는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몇 번의 토악질 소리와 변기 물 내리는 소리. 곧이어 아주 천천히 온 정신을 집중해 칫솔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한 거예요?”
“뭐긴 뭐야, 으읍. 너도 해 볼래? 정말 기분 짱이라구.”
숙희는 옷을 입을 생각은 안 하고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소파 옆에 기대앉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힘을 줘 끌어당겼다.
“약 기운 있을 때 섹스하면 최곤데…. 나 지금 완전히 젖어 있다구. 응?”
목소리도 그랬다.
“그만 일 가봐야 해요. 몸조리 잘 하고 나중에 또 봐요.”
그녀에게 질린 난 바지를 입으려 일어서려 했다. 힘이 더 들어간 숙희 손은 나를 뒤로 확 잡아챘다.
“그거 뛴다고 얼마나 버는데. 으읍, 여기 있어. 내가 스폰하면 될 거 아냐.”
스폰이란 말을 들어본 적 있다. 호스트 중에서도 일급에게만 붙는다고 했다. 돈의 가치를 생각한 적 없는 부잣집 마나님들이 아들뻘 되는 호스트들의 환심을 사려고 좋은 차도 사주고 방도 구해줄 뿐만 아니라 온갖 명품들, 비싼 옷들을 공수한다. 물론 그렇다고 늙은 너구리들의 몸값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용욱이나 재형이도 그 여자들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가능한 섹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돈을 주니 여자들이 원할 때마다 호출에 응대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젊은 여자들은 돈보다는 먼저 감정에서 시작해 또래 호스트들을 사귀고, 연애의 속성상 결국 돈으로 독점하려 드는 것이 하나의 ‘관례’라고 했다. 숙희를 만난 지 겨우 몇 시간도 안 돼서, 게다가 섹스한 것도 아닌데 스폰을 한다는 건 좀 의외였다. 약을 한 김에 그녀를 달랠 누군가가 필요하자 말한 것뿐이리라. 게다가 난 호스트도 아니었다.
“왜, 싫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른들의 말이었다.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나, 돈 많아. 시간도 많고. 너랑 즐겨보고 싶어. 아까 널 초이스한 이유, 정말 뭐라고 생각해? 널 보는 순간 한방에 뻑갔다구….”
어린 애들 같은 고백이다. 세상에서 그런 허황한 말은 처음 들었다. 숙희는 말하면서 눈을 감더니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내 대답은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선택해야 했다. 집으로 가든지, 여기에 머물든지.
누워 있는 여자를 천천히 훑었다. 지금까지 알았던 여자들과 달랐던 건, 무언가에 자신이 가득하다는 것, 그 허황한 자신감이 그녀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점 같았다. 숙희 얼굴에는 그 자신감이 강하게 배어 있었다. 억지로 강한 척하는 것과 다르다. 그런 여자들은 싫다.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녀 방으로 들어갔다. 호기심에는 단순하다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저 할 일이 없을 땐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땐 낯선 누군가의 방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갑작스런 제안을 한 여자가 어떤 방에 매일 누워서 꿈을 꾸는지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다. 깨끗한 방, 더블 사이즈 침대 위에는 핑크색 이불이 제대로 걷히지 않은 채였다. 그 옆 화장대 의자 위에는 핸드백이 놓여 있었고, 지갑은 화장대 위에 펼쳐진 채 있었다. 오돌토돌한 자주색 가죽으로 된 두꺼운 지갑이었다. 지갑을 열자 신분증과 여러 장의 카드가 있었다.
신분증에 있는 이름은 정말 진아였다. 황진아. 화장기 없는 얼굴의 진아는 내가 알던 진아가 아니다. 낯설었지만 호감이 갔다. 지금과는 다른 검은색 단발머리의 여자는 세상을 알기 전 표정을 짓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갑자기 동전 두어 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움찔했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찾아 지갑에 넣으려고 보니 수십 장의 백만 원, 십만 원권 수표와 현금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돈을 보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먼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나와 그와의 관계를 탐색하고 그 돈의 운명을 결정한다. 나와 숙희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 그러니 이 돈 일부를 가져가도 별 상관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용기였다. 거실 소파에서 마약에 취해 누워 있는 여자는 용기를 북돋웠다.
나는 어떤 가책도 없이 백만 원짜리 수표 세 장과 십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을 제자리에 두고 핸드백을 봤다. 담뱃갑 모양의 금박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열어보니 잘 다진 담뱃잎 비슷한 것과 누르스름하고 바짝 말린 종이가 있었다. 이 여자는 잎담배를 피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금박 케이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담뱃잎을 조금 덜어서 그 위에 얹었다. 잎담배는 처음이다. 영화에서처럼 담뱃잎을 골고루 흩뜨려 종이를 말았고 침으로 붙였다. 일반 담배의 반 정도 되는 굵기라 양을 적게 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핸드백에 있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재떨이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다.
연기를 깊이 마시자마자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잎담배가 독한 탓이려니 생각하고 걸음을 멈춰 냉장고 옆에 잠시 기댔다. 어지러움이 가시자 약하게 구토가 밀려왔다. 입을 꾹 다물어 침을 삼켰다.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다시 어지러움이 생겼지만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감은 잠시 동안 한나절의 꿈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기분 좋은 꿈이어야 한다는, 한껏 기분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이 뇌를 자극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아무 대가 없는 330만 원의 돈과 나는 하나가 됐다. 330만 원은 크게 부풀려져 수십억 원이 되고 나는 어렸을 때의 꿈 그대로 무언가가 돼가고 있다.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전 세계의 모든 현자가 내 수하에서 고귀한 가르침을 구걸한다. 현자들과 철인들의 시대가 다시 시작됐다. 나는 아무 고민 없이 소일거리를 찾아다닌다. 바다가 보이는 저택, 따듯한 물이 가득한 수영장에서 수영하며 커다란 개를 기르고 있다.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마시고 먹을지 고민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헌신적인 여자들은 많다. 이미 네 번의 이혼을 한 뒤였지만, 지금 여자 말고도 예쁜 여자들은 언제든지 내 것이 될 수 있다. 따뜻한, 바다 냄새를 그대로 간직한 햇볕과 바람을 쐬며 커다란 의자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다가온다. 잔뜩 발정이 난 암괭이 같다. 난 그 여자가 내 이마에 조용히 키스하고, 지퍼를 내리고 그것을 빨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랫도리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책이 내게 하는 말이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날 뿐이다.
감히 나보고 너 자신이 되라고 하다니. 너나 잘 하면서 살아, 난 세계 최고의 철학자라구, 종교적 천재이기도 하지, 가끔 우리 철학자들, 글쟁이들은 많은 사람의 성격과 인격, 상황과 경험들이 있어야 했기에 정신분열, 우울증, 조울증을 달고 있어, 남들이 보면 귀신이 들렸다거나 미쳤다거나 꼭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을 하겠지, 결국 직업병이라구,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 그래야 좋은 글을 쓰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책을 팔고 강연을 하며 겨우 먹고 살게 되는 그런 거라고.
여자의 솜씨는 대단했다. 혼자 달아오르더니 혼자 신음을 내고 혼자 정액을 받아 마신다. ‘쇠 냄새가 나.’ 여자는 소리 내지 않았지만 나는 들을 수 있다. 사정하면서도 쾌감이나 어떤 동요도 없다. 여자는 입가에 묻은 액체를 혀로 핥는다. 다시 조용히 지퍼를 올리고는 일어서나 했는데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미쳤구나!”
숙희 목소리였다.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다섯 가치는 더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니 스폰한다고 했지 언제 가방까지 뒤지라고 했어?”
머리는 헝클어진 채 팬티만 입은 여자였다. 화난 목소리와는 달리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보였다.
“미친놈, 정신이 드냐? 마리화나 처음이지? 그거 가지고 해롱해롱 하다니….”
마치 이제야 동지의식을 느끼겠다는 편한 말투였다. 나는 순간 주머니 속 돈을 생각했다. 돈은 우정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법이니까. 심지어 사랑까지도.
“몇… 몇 시야?”
“깔깔깔. 아쭈, 이제 반말까지 하네. 아직 정신 못 차렸구만. 9시다. 어쩔래?”
“좀 비켜봐. 밖이 안 보여.”
그랬다. 벌거벗은 숙희는 냉장고에 기대어 앉은 내 앞에 정면으로 서 있었다. 세상을 가로막아 주겠다는 모습이었다. 내 손끝에는 반쯤 타다 꺼진, 숙희 말대로라면 마리화나 꽁초가 있었다.
“좋아, 비켜주겠는데 니가 내 보물을 가로챘으니까 나도 니 보물을 맛 좀 봐야겠어. 약 기운은 거의 떨어졌지만.”
몸이 마비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힘이 없었다. 더 대꾸하거나 화를 내기도 귀찮았다. 너무 오래 살았고, 너무 오래 생각했고 너무 오래 글을 썼기 때문이리라.

(중략)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가끔 오후에 외출하는 것 말고 숙희는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정오가 다 될 때야 일어나 밥을 시켜 먹고 차를 타고 나가 쇼핑하고 밤이 되면 그저 섹스하고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업소에는 몸이 아파 며칠 쉬겠다고 했다. 요한이 형은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통화를 듣고 있던 간담은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간담은 여자란 믿을 게 못 된다며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민희와 홍균이 형이 찾고 있으니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어느 날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섹스를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둘은 서로에게 다정히 주사를 놓고 서로의 구역질을 봐가며 섹스를 했다. 약을 하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에 빠져들어 가듯이 나는 서서히 숙희, 세 번째 진아와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관계 속으로 미진이와 나영이도 들어왔다. 의외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세 사람은 양성애자였고 나는 숙희 집으로 놀러 온 미진과 나영과 그리고 숙희와 동시에 섹스했다. 섹스는 나쁜 감정을 순화시키고 적을 동지로 만들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우리는 사이좋게 주사를 놓고 음악도 나누고 비싼 와인과 철 아닌 과일을 즐기며 서로를 나누었다. 성찬의 연속이었다.
즐거운 일이다. 즐거운 일은 말하지 않는 게 낫다. 말해지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깊은 좌절감에서 빠져나오게 하니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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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판 일 : 2017.12.22 ⓒ K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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