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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몰의 시작 #31] 그날 아침 해는 뜨지 않았다
어린 여자의 문을 찾던 늙은 여자의 손은 내 팔뚝을 할퀴더니 한참 뒤에야 침대 옆으로 툭, 떨어졌다. 그 외에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나 또한 별다른 감흥도, 느낌도 없었다. 그저 늙은 여자 얼굴에서 베개를 들어낼 때 우리 눈은 마주쳤고 그 순간 잠시 영원의 언어가 서로에게 전달됐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출근 전에 숙희는 새로운 종이라며 물에 타 먹는 약을 가져와 함께 나눠 마셨다. 필로폰보다는 덜했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속이 계속 메스꺼웠다. 기분이 별로일 때는 무엇이든 짜증 나는 법이다. 나는 불평과 짜증에 익숙해져서 욕하고 남을 비웃는 데 조금도 걸림이 없었다.
오늘도 해가 지고 밤이 시작된다. 자연도 모든 일에 익숙해진 지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다. 평소보다 일찍, 새벽 3시가 돼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랬다. 여전히 손님들이 있었고 바빴지만 그만하고 싶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8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집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음악 소리가 들렸다.
“어, 준이 왔네.”
나영이였다. 한 손에는 와인병을 들고 춤까지 추고 있었는데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목소리만 들어봐서는 이미 약을 한 것 같았다.
“숙희는 없어, 아직 안 들어왔다.”
“혼자서 뭐해?”
“나야 뭐 이 집 분위기 좀 즐기려는 거지. 어때? 일루 와서 내 춤 파트너라도 하는 게?”
“약 얼마나 했어?”
난 이미 숙희에게 그렇듯 나영이와 미진이에게도 반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문 앞에 나타난 여자는 단발의 어린 소녀였다. 그리고 역시 나체였다. 남자가 아닌 것이 이상한 일이다. 벗은 몸을 수건으로 가리려는 것을 봐서는 나이가 어린 것이 분명했다.
“인사해, 얘는 상미야. 여긴 준이고.”
“무슨 일이야? 얘는 또 뭐고? 어려 보이는데? 너 몇 살이니?”
“열 다….”
“됐어. 그만해.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나영이는 아이가 나이를 말 못 하게 했다. 나도 이제 열아홉이 됐지만, 열다섯이라는 여자애는 너무 어렸다. 숙희는 내가 스물하나, 아니 이젠 스물둘이 된 거로 알고 있지만 말이다.
“뭐 하려고, 얘한테도 약하고 섹스 가르쳐 주게?”
“왜 이러셔. 단지 집 나온 중학생일 뿐이야. 이 친절한 언니가 잠시 보호해 주는 거라구.”
“보호 좋아하네. 어린애는 안 돼. 너 나가.”
나는 소파 위에 있던 옷을 집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여자애에게 쥐여주고는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여자애는 쭈뼛거릴 뿐 갈 생각을 안 했다.
“니가 뭔데 지랄이야!”
나영이는 악을 썼다.
“여긴 내 집이야. 숙희는 어디 갔어?”
“니 집 좋아하네. 야! 여기는 우리 아지트라구. 왜 니가 참견이야!”
“호텔이나 가서 놀아. 숙희 오면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숙희 그년 오늘 안 와, 병신아. 너 말고 딴 새끼랑 놀아나는 것도 몰랐냐?”
거짓말이다. 숙희는 거짓말할 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할 사람이다.
“빨리 나가.”
“못 나가. 오늘 밤엔 네가 우리 둘을 상대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을걸?”
나영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나는 종이를 낚아채 읽었다. 내 초본과 등본, 사진과 가족사진 몇 장이 있었다. 진아 사진과 홍균이 형과의 일들,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어디서 났어?”
“얻다 대고 반말이야. 내가 조사 안 했을 것 같아?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났냐고!”
내 뒷조사를 하고 다녔다는 것에 화가 났다. 과거가 폭로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잊고 살려는 일을 끄집어내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다. 강요는 사라져야 할 악덕이다.
“숙희는 아직 몰라. 걔한테 말하기 전에 내가 요구하는 걸 듣는 게 좋을걸.”
“싫어. 어서 나가줘.”
나는 화를 자제하고 대답했다.
“니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숙희가 속은 걸 알면 넌 그냥 버림받을걸? 이 바닥에도 소문나서 일도 못 할 거야. 집으로 돌아가 공부나 하면서 살지그래? 아니면 오늘 밤만 견디면 돼.”
다리가 서서히 풀리는지 나영이는 소파에 앉으며 말을 끌었다.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상미라는 여자애는 거실 한쪽 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다가 나영이 자리에 앉자 곁에 따라 앉았다.
눈앞에 벌거벗은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약을 했고 한 여자는 가출한 중학생이다. 두 사람의 모든 크기는 비슷하다. 오히려 중학생 키가 더 크기 때문인지 순간 나영이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한 여자의 요구에 따라 나는 두 여자와 관계를 해야 한다. 이건 부조리의 극치다. 한 여자를 죽여야만 한다.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에 미치광이에 스스로 창녀가 된 여자다. 죽이고 싶었다. 나영이만 죽으면 모든 문제는 사라질 수 있다.
“좋아, 그러면 우리 둘만 해. 얘는 빼.”
“그러면 아무 소용없어. 우리 함께 죄를 짊어지자고. 히히히.”
혼자의 욕망과 그 죗값을 다른 누군가에게 짊어지우는 역사가 우리의 보편적 전통이라지만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난 그 어느 과실을 따 먹는 데 응하지 않았을뿐더러 손을 씻고 샤워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영이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략)

내 것을 빨고 있는 어린 여자 등 위로 몸을 굽혀 베개를 하나 집어 든다. 눈을 감고 어린 여자의 것을 음미하던 늙은 여자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생각은 없다. 그저 무언가만 사라지면 된다는 소리가 들린다. 사라지면 된다. 너만 사라지면 된다.
늙은 여자가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다시 어린 여자의 문을 찾는 순간, 나는 베개를 그녀 얼굴에 묻는다. 순간의 행동에 놀란 어린 여자의 입은 내 것에서 떨어진 뒤 내 몸에 밀려 침대 아래까지 떨어진다. 그 여자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 방해하면 일을 망칠 수 있다. 베개를 오래도록 누를 수 있다. 어린 여자의 문을 찾던 늙은 여자의 손은 내 팔뚝을 할퀴더니 한참 뒤에야 침대 옆으로 툭, 떨어진다. 그 외에 별다른 저항은 없다. 나 또한 별다른 감흥도, 느낌도 없다. 그저 늙은 여자 얼굴에서 베개를 들어낼 때 우리 눈은 마주쳤고 그 순간 잠시 영원의 언어가 서로에게 전달됐다고 느껴진다. 지상의 모든 언어는 모두 단 하나의 언어, 즉 신의 영원한 방언으로 진화한다.

나영은 죽은 듯이 있었다. 다행히 눈을 감고 있어 죽은 여자의 뜬 눈을 보지 않아도 됐다. 입 주변에는 침이 아닌 다른 액체가 흘러내렸다. 미처 삼키지 못한 것이다.
상미라는 여자애는 침대 옆에서 내 행동을 뚫어지라 보다가 나영이가 요동하지 않자 서서히 몸을 떨었다. 다행히 소리는 지르지 않았다. 많은 걸 보고 참아 왔을 것이다. 나는 불을 켰다. 어린 여자 볼에는 흘러내린 눈물 몇 방울에 붙은 고불거리는 털이 묻었다. 아마도 내 것이겠지.
“괜찮아, 떨지 말고 옷 입어. 곧 나갈 거야.”
침착하게 말했지만, 나 역시 숨이 가빴고 심장이 떨린다는 것을 느꼈다. 가방에 돈이 될 만한 시계와 숙희 귀걸이, 목걸이들을 챙겨 넣었다. 옷장을 뒤져 숨겨 둔 돈도 찾았다. 상미가 서서히 소리 내 울면서 세수하는 동안 메모를 남겼다. 진정이 되지 않아 글씨는 뒤죽박죽이었다.

「당분간 모른 척해줘. 사정이 있었어. 연락할게. 그동안 고마웠다.」

시곗바늘이 아침 6시를 가리켰다. 나가야 할 시간이다.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게 된다. 우리는 계단으로 지하까지 내려갔다. 오토바이를 꺼냈다. 상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뒤에 앉아 허리를 꼭 잡았다.
일단 한남대교를 지나 신사역사거리로 왔다. 이른 아침이라 휑하기만 한데 아직도 숨겨진 곳곳 업소에서는 계속 영업 중이다. 아는 사람만 아는 진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가게 앞에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이제 내려야 하는 것을 육감적으로 안 상미는 헬멧을 벗어 넘겼다.
“집으로 가. 갈 곳 없으면 이곳으로 가 봐. 내 이름 대고 홍균이라는 사람을 찾으면 돌봐줄 거야.”
나는 상미에게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홍균이 형의 연락처를 줬다.
“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진술할 일이 있으면 말 잘 할게요….”
고개를 숙이고 상미는 말했다. 내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그만 가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하지만 나 역시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도 아직 이 세상을 십 년 하고도 팔 년 넘게 살았을 뿐이다. 그 사실이 갑자기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그날 아침 해는 뜨지 않았다. 나는 이 어둠이 영원히 지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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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판 일 : 2017.12.28 ⓒ K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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