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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몰의 시작 #32] “진아가… 결국 자살 했어요.”
신은 그 무엇에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자신이 창조주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경계선에는 그 싫증이라는, 한없이 추악하고 더러운 감정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벚꽃이 피었다. 어렸을 때 봤던 벚꽃은 몽우리만 오래 보이고 금세 지곤 했다. 이곳 벚나무에 달린 꽃들은 일찍 개화해서 오랫동안 활짝 피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 그것 하나 좋았다.
나영이 사건은 숙희가 처리했는지 치사량의 마약 복용으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났다. 숙희는 수십 개의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꼭 돌아오라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지방을 전전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고, 벌써 석 달째 그 생활을 이어왔다.
그날 아침 나는 가평과 청평을 지나 홍천까지 이동했다. 바이커들에게는 유명한 길이다. 아무의 제지를 받지 않고 거제도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처음 며칠간은 조끼 안쪽에 늘 칼을 차고 다녔다. 불심검문에 대한 망상, 여관방에 들이닥치는 경찰들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손에 칼을 쥐고 자다가 몇 번이나 팔과 허리, 허벅지를 그었는지 모른다. 상처가 아물 때마다 흉터는 그대로 남아 몸의 윤곽이 점차 달라졌다.
안 좋은 일도 있었다. 그날 이후 잠에서 깨면 가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에는 하루 종일 여관방에 누워 있어야 했다.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팠고,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가슴이 조였다. 처음에는 가위에 눌렸거나 마약 금단 증상 때문인 줄 알았다. 나는 단지 약을 끊는다는 것이 과거를 잊는 것보다 쉽다는 걸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역시나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의지력을 실험했고, 성공했다. 반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맥박은 빠르게 뛰고 한번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손도 심하게 떨렸다. 네 번째 마비가 있던 날은 울진에서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갔다. 몇 가지 검사를 하던 의사는 갑상선 항진증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91년에 조지 부시 대통령도 이 갑상선 폭풍에 휘둘렸지. 신의 징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만, 학생은 그럴 일이 없지 않겠어?”
다행인 것은 약값이 쌌고, 약을 먹고 두 달이 지나자 손이 떨리거나 마비가 오는 증상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나중에 기억이 난 건데 처음 만난 날 진아는 어렸을 때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고 말했었다.
반가운 연락도 있었다. 홍균이 형과 상미, 용욱이가 연락했었다. 형의 전화를 받고는 좀 어색했었지만, 오토바이로 지방을 여행하고 있다고 하자 호연지기를 칭찬하며 돌아오면 꼭 찾으라고 당부했다. 민희는 업소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얘기를 하다말고 울었다. 간담과 요한 형은 위생법 위반으로 예외적으로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치소에 들어간 지 넉 달째라고 했다. 신사동 업소는 문을 닫았고 용욱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대전으로 내려가 있으며 홍균이 형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 뒤 연락이 닿은 용욱은 대전 유성에 오면 들르라면서 나중에 꼭 함께 일하자고 했다.
상미에게도 연락이 왔었다. 당시 나는 경북 성주에 있었는데, 그곳은 은정의 고향이었다. 물론 은정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예술가이면서도 떡볶이를 먹고 싶어 하던 은정이 생각났다. 상미도 은정과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인이 일어났던 순간에 나보다 더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런 경험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전화기로 들려온 상미 음성은 좀 더 밝았는데 홍균이 형 밑에서 편하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감사하다고… 했다. 서울에 돌아오면 꼭 연락을 달라고 했다.
성주를 떠나 부산과 거제도를 거쳐 창원과 진주, 하동을 지나 강진까지 왔을 때는 남도의 벚꽃도 빗물에 씻긴 4월 말이었다. 남도의 일몰은 장관이었다. 마치 비에 씻긴 벚꽃의 모든 죽은 잎들이 다시 살아나 바다에 실려 일몰 속으로 스며든 것 같았다.
남도의 일몰을 보면서 몇 번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어느 날, 강진 마량포구의 한 여관방에서 이상한 일을 겪었다. 옆방에 있던 한 노인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그는 마치 도인처럼 흰색의 긴 수염을 했다. 어느 날 저녁 여관 근처 포장마차에서 자리를 합석하게 됐고, 노인은 안주로 붕장어를 사준다면 점을 봐준다고 했다.
“생년월일하고 시를 불러봐. 내가 이래 봬도 왕회장 일을 봐주던 사람이었어.”
술이 얼큰하게 들어간 노인은 아직 정정하게 살아 있는 정주영 회장 이야기를 거들먹거렸다. 중학생 때 그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런 건 별 기억에 없고, 소 떼를 몰고 방북했던 모습만 떠올랐다. 온화해 보이는 노인이지만 그만큼 어리석을 수도 있다. 나는 점 같은 걸 본 적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았다. 그저 노인과 대작하며 기분을 맞추는 것이라고 여기며 대답했다.
“79년생입니다. 10월 22일이구요, 오전 9시 40분경에 태어났다고 해요.”
노인은 구깃구깃한 종이를 펼쳐 적고 잠시 생각하더니 그 위에 낙서를 했다.
“어린놈의 자식이 여기엔 왜 있어? 공부를 계속해. 그것밖에 없어.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가져. 서른 살까지는 고생하겠지만, 그 이후엔… 아주 좋아.”
역시나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공부를 하라니.
“저… 노인장, 글 쓰는 일을 해도 될까요?”
“그것도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이야. 괜찮아.”
노인은 더 대꾸도 안 하고 남은 소주를 한 잔 쭉 들이켜더니 먼저 일어난다는 말도 없이, 이제 막 나온 안주도 마다하고 포장마차를 떠났다.
‘이상한 노인이야. 그래도….’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서른 살까지 고생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까지 내가 그 무엇에서도 일가를 이룰 수 없다는 말이 비참했다. 그 이후엔 아주 좋다는 말도 모호하지 않은가?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산다는 말인가? 아니면 혹 서른 살에 죽는다는 것은 아닌가? 난 죽음 이후의 삶에 호기심이 강해서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으니 그 이후, 즉 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되는 때가 가장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인간은 호기심이 많은 종족이라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고 신처럼 전지전능해지기를 원한다. 심지어 처음 만난 여자의 생각이나 속옷 사이즈, 과거의 일을 알고 싶어 한다. 정부의 비밀스런 정책도 다 알아내 폭로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만큼 흥미로운 게 있을까? 미래를 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또한 싫증을 내는 종족이라는 게 문제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모든 걸 알고 경험해도 금세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신은 그 무엇에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 자신이 창조주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피조물과 창조주의 경계선에는 그 싫증이라는, 한없이 추악하고 더러운 감정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몇몇 철학자들은 그 경계를 넘으려 했었다. 플라톤은 남자아이들을 통해서,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를 통해서, 키에르케고어는 레기네 올센을 통해서.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영향 아래 있는 철학자들 대다수는 뚱뚱한 자기 아내를 통해 넘을 수 없는 산을 넘으려 한다. 자의식이 강하고 편협한 그들은 감정의 초보자로 이론의 이름으로 모든 짓거리를 저지를 일 뿐이다. 철학자는 자신을 포함해 세상 모두와 신까지도 속이는 사이코패스다.
죽음 후에 다른 세상이 있다면, 내가 사랑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인을 만난 지 이틀이 지났다. 여관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데 벨이 울렸다.
“저, 준이 씨 맞죠?”
세아라고 밝힌 여자 목소리는 다급했다. 물론 난 세아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진아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업소에 다녔던. 그녀도 나에 대해 알지만 나를 만나 본 적은 없다.
“진아 알죠? 진아가 곧 죽어요. 빨리 서울로 와요. 부탁이에요. 제발….”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진아는 나를 떠났다. 물론 진아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서는 안 됐다. 진아가 원한대로 난 변했다.
“모든 사정은 만나서 얘기할게요. 빨리요, 한시가 급하다구요.”
“알았어요. 어디 병원이죠?”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이라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오토바이는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고 강진 시내로 나와 고속버스를 탔다. 그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평일 오후였고 차는 막히지 않았지만 무려 7시간이 걸렸다. 버스가 서울에 들어설 때 많은 생각이 흘러갔다. 우습게도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을 나온 뒤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물론 부모님 쪽에서 연락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실까. 내가 없어도 그 집은 잘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가족 또한 내게는 이제 없는 것으로 생각한 지 오래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뛰다시피 해서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병원의 그 퀴퀴하고도 소독된 냄새를 맡으니 시간을 인식하던 정신은 금세 자리를 비켰다. 1층 응급실에 도착했다. 중환자 대기실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가서 진아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중환자실은 3층이라고 했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 진아 이름을 찾았다. 병실 앞에 도착했다. 이름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저, 여기가 진아….”
일 년 하고도 반년이 지나서야 진아가 내 앞에 나타났다.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 누워 있는 진아는 의식은 없어 보였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준이 씨죠?”
다른 여자와 남자는 나를 힐끔 보더니 말았다.
“네….”
“전화했던 세아예요. 와줘서 고마워요. 나가서 얘기하죠.”
세아와 나는 일 층으로 내려와 병원 뒤쪽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갔다. 세아는 지난번에 목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쌍욕을 하며 진심을 말하던, 무척 예민하고 까칠했는데 지금은 침착했다.
“진아가… 결국 자살을 시도했어요. 미친년이 어디서 농약을 사 와서 그걸 마셔버렸어요. 함께 출근하려고 집에 갔을 때는 이미 늦어서… 위세척을 했지만 소용이 없대요.”
“왜… 진아가 왜….”
“힘들어했어요. 나한테도 많은 걸 숨기고 있었고, 준이 씨와 헤어지고 나서는 우울증이 심해졌어요. 매일 술을 달고 살았는데 그렇게 될 줄 몰랐죠. 쌍년… 죽을 용기 있으면 살아나 볼 것이지…. 살 수 없었다면 죽을 수도 없는 거 아니야?”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힘들어도 다수가 죽음을 택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시도해도 누구는 죽지 않고 누구는 살기 마련이다. 자살이라고는 하지만, 그 죽음 또한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자살을 긍정하는 사람들의 믿음에조차 신은 반응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진아는 내면의 요구에 응했고, 신은 그런 진아의 용기에 답했을 뿐이리라.
“제가 아는 한 일 따위는 없었어요. 그냥 힘들다고 말할 뿐이었고.”
“그래요….”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세아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질문했다.
“왜 그동안 진아를 찾지 않았어요?”
세아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시니컬했다. 순간 나는 울컥했다.
“진아와는 헤어졌어요. 진아가 원하는 대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얘긴 들었어요. 하지만 진아가 늘 기다렸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둘이 같이 살았다면서.”
‘나도 늘 진아를 생각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세아에게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대답 좀 해봐요.”
“말했잖아요. 진아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서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치, 진아가 말한 대로 정말 여자를 모르는군.”
들을 귀 있으면 들으라는 식으로 세아는 내게 말을 내뱉었다.
“홍균이 오빠 알죠?”
“네.”
“조만간 오빠를 찾아가 봐요. 어제까지 같이 있어 줬는데… 고마운 오빠예요.”
“형을 좋아하지만 진아 일로 만나기는 싫어요. 형은 내게도 거짓말했어요.”
“뭐, 진아가 자기 업소에서 일한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고?”
의외였다. 세아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왠지 세아는 내게 화가 난 것 같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응, 수미야. 여기 병원 뒤쪽 공원이야. 준이 씨랑 같이 있어.”
간단한 대답 후에 세아는 바로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진아와 방금 전화 온 수미와 나, 이 셋은 단짝 친구였어요. 진아가 얘기했을지 모르겠는데 진아와 난 초등학교 동창이고요. 서로 모르는 일이 없어요.”
세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원 입구에서 작은 키에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짧은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빨간색 우산을 든 여자가 나타났다. 저 여자는 분명 수미일 것이다.
“수미야, 여기!”
내 생각이 맞았다. 세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수미는 우리 곁으로 왔다.
“여기는 준이 씨야, 너도 알지?”
수미는 나를 힐끔 보더니 반말로 인사했다.
“아, 안녕?”
“네….”
“뭐야, 둘은 말을 놓는 거야?”
“그럼 너 여태까지 존댓말 했어? 얘 우리랑 동갑이잖아.”
넉살은 수미가 더 좋아보였다.
“진아는 좀 어때?”
“의사 말로는 오늘 넘기기 힘들 거래. 사흘이나 견딘 것도 대단한 거래….”
‘사흘 전 일이었구나…. 그런데 왜 오늘에서야 나를 찾은 걸까.’
“가져 왔어?”
“응, 여기.”
수미는 세아가 아니라 내게 봉투를 하나 넘겼다.
“이건?”
“진아 유서일 거야. 고향 집 김제 주소도 함께 있고.”
세아도 금세 말을 놓았다.
겉면에 ‘준이에게’ 라고 쓰인 봉투를 뜯었다. 진아가 쓴 편지, 아니 유서가 있었다. 난 진아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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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판 일 : 2018.01.03 ⓒ K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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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음   글 [일몰의 시작 #33]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자살해도 죄는 아니겠지?
이   전   글 [일몰의 시작 #31] 그날 아침 해는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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