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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일몰의 시작 #34] “어제 일몰은 마치 일출과도 같았지”
“어제 일몰은 마치 일출과도 같았지. 내 칠십 평생 그런 건 처음 봤는데 말이야. 해가 거꾸로 뜨냐고들 하지. 정말 그런 것 같았는데 말이야. 붉은 태양 위로 녹색섬광들을 볼 수 있었지.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단 말씀이야….”
진아는 새벽에 죽었다. 1999년 5월 18일 월요일이었다. 그날은 우리 또래들이 성인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죽음으로 진아는 어른이 됐다. 어둠이 그치고 진아의 새로운 삶이 시작했다고, 그와 더불어 나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침부터 장례 준비가 시작됐지만, 나는 다시 서울을 떠났다. 나중에 세아에게 듣기로는 홍균 형과 진아가 다녔던 업소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이 함께 도와 장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김제에서 진아 어머니와 지혜가 왔었고 진아는 고향 집 뒤뜰에 묻혔다.
강진으로 돌아온 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처음 이틀은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하기에 병원으로 옮겨야 할지 걱정했다고 여관 주인이 일러줬다. 사흘 만에 잠에서 깨어났을 땐 몸도 머리도 가뿐했다.
“장관이었지.”
옆방 노인은 신발을 신고 있는 내 옆을 지나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제 일몰은 마치 일출과도 같았지. 내 칠십 평생 그런 건 처음 봤는데 말이야. 해가 거꾸로 뜨냐고들 하지. 정말 그런 것 같았는데 말이야. 붉은 태양 위로 녹색섬광들을 볼 수 있었지.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단 말씀이야….”

나는 다시 여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먼저 세아가 준 진아 고향 집을 찾아갔다. 김제 시내에서 오토바이로 20분을 더 가야 하는 시골이었다. 집 근처에는 양계장이 있는지 닭똥 냄새가 심했다. 진아 고향 집은 조용했다. 지어진 지 30년은 지난 것 같은 오래된 옛날 집이다. 마당 뜰 뒤쪽에 있는, 장례가 막 끝난 무덤은 황토색 흙뿐이었다. 비석에는 진아 이름 앞에 ‘성도’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정확히 스무 해를 이 세상에서 보냈다. 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번 더 오열했다. 진아가 보고 싶었다. 과거를 되돌리고 싶었다. 우리의 십 대를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거 누구요?”
진아네 집 담장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분명 진아 어머니일 것이다. 내 울음을 듣고 나온 것이리라.
“거 누군데 남의 무덤에서 그러고 있소?”
진아와 닮은 모습이었다. 진아가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다. 조금은 넓은 이마, 눈썹 사이로 양미간이 평평한 것 하며, 부르튼 입술,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가 그랬다. 진아 어머니가 내 쪽으로 더 가까이 왔다. 갑자기 숨이 막혔지만 대답을 해야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진아… 친구입니다.”
순간 날 알아본 것 같았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요…. 집으로 좀 들어오소.”
그때 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이 점차 커지자 내 안에서는 두려움이 시작됐다.
“아, 아니에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는 데 방문이 열렸는지 아이 울음소리가 더 세차게 들렸다.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보면 자리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아 어머니에게 대신해서 모든 사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다.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왔다. 홍균이 형과 숙희, 세아 모두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진아와 같이 살던 집 근처에 방을 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가 살던 집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신혼부부는 우리 가구와 집기를 전부 들고 갔다.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검정고시를 했던 고려학원에서 새로 개설한 수능 반에 등록했다. 개강 첫날, 물리 담당의 젊은 담임선생님은 내가 이 학원 검정고시 출신인 것을 알고 반장을 맡겼다. 난 또래 재수생들과 공부했다. 그래, 나는 고학하는 재수생이 된 것이다.
낮에는 근처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고 저녁 6시부터는 공부했다. 7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진아가 다녔다는 교회를 찾아갔다. 손바닥만 한 믿음도 없었고 끝 모를 연민에 빠져 슬퍼만 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선한 목적이며 선한 예정이라는 것을 믿었다. 처음에는 11시에 예배만 참석했지만 나중에 내가 진아 친구임을 알아본 목사님의 권유와 배려로 토요일 저녁마다 성경공부 모임에도 참석하게 됐다.
8월이 되자 일부 이단들과 광신도들이 전국의 산과 십승지로 몰려 환란과 종말을 피하려 했다.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곧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이들을 보도하며 함께 떠들었지만 9월이 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9월 말부터는 일과 학원 모두를 그만두고 남산에 있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 학원에 매여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의욕도 떨어지고 나태해져 공부보다는 산책하고 글을 쓰는 일이 잦아졌다. 플라톤과 루이스를 읽거나 성경을 읽었다. 내 전부를 보여줄 수 있었던 내 3할의 진실을 이해하고, 더 늦지 않도록 내가 쓴 글이 모여 되살아나는 날에 진아가 되살아날 것만 같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가끔 옛 생각이 나서 신사동으로 가기도 했었다. 업소는 아직 문이 닫혀 있었다. 역삼동으로 가서 진아가 일한 업소 앞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11월에는 세례를 받았다.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목사님은 늘 열정이 가득했고, 유쾌했으며 사람들에게는 다정다감했다. 교회 개혁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함께 헌신하고 애쓰며 때로는 오해 때문에 힘들어하는 목사님에게 정이 갔다. 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른 설교와 교회 공동체 생활,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목사님에게 세례 문답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날 모든 교인이 축하했다. 행복했다. 세례를 받고 며칠이 지난 11월 19일에 수능을 봤다. 수능 전날에 먹은, 조리한 지 사흘 된 카레 덕분에 체해서 시험 내내 식은땀을 흘렸다. 점심엔 시험장 구내매점에서 따뜻한 콩 음료를 마시고 다시 시험을 봤다. 검정고시 시험을 봤던 그때가 생각났다.
시험이 끝나고, 다음날부터 다시 식당 배달 일을 했다. 한 달이 지나 성적표가 발송됐다. 결과는 노력이나 기대했던 것보다 잘 나왔다.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에는 전부 지원할 수 있는 점수였다. 하지만 여전히 신학을 공부하는 데 두려움이 있었다. 이 땅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 목사는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나는 여전히 염증이 나 있었다.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천안에 있는 한 종합대학교에 기독교철학이라는 전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기 말에 그 전공에서 주최한 기독교철학 심포지엄에 참석하고자 천안까지 내려갔다. 세 명 교수들의 발표와 토론이 온종일 이어졌다. 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보였던 성경책 모양의 학교 건물 사이로 낮게 낀 초겨울의 비구름과 안개들이 자아내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일종의 사인이었다. 마음속에서도 이곳에서 공부해야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난 주저 없이 지원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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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판 일 : 2018.01.08 ⓒ K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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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음   글 [일몰의 시작 #35] 1999년은 종말의 해였다.
이   전   글 [일몰의 시작 #33]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자살해도 죄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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