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시작 #4] 그 표정은 마치 황소에게 욕정을 품은 파시파에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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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진아

“너도 그은 거니? 두 군데나 있네.”
그 여자애였다. 엄마뻘 되는 여자에게 매몰차게 욕을 해대던 냉정한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이마엔 칼자국 같은 상처가 이미 아문 흉터가 나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둥그런 윤곽의, 꽤 귀여운 얼굴이다. 어깨 윗선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까맣다 못해 어두워 보였는데 투명한 얼굴 피부와는 극명하게 대조됐다. 큰 눈을 감싸고 있는 눈썹은 적당히 오목한 반달 모양이고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볼록한 뺨은 연분홍빛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극단적인 모범생, 아니면 극단적인 불량학생이 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는, 후자인 듯하다.
“손목에 난 상처 말이야.”
그 애는 내 손목 상처를 보고 말했다. 내가 자살을 그런 식으로 시도했으리라고, 그래서 이곳에 온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며칠 전 교회에서 아이들과 놀면서 담장을 넘다가 긁힌 상처였다. 피를 보면서 자살할 만큼 용기 있는 놈은 아니지만, 대답은 정반대로 했다.
“응… 그래.”
“난 진아라고 해. 오늘 처음 왔지? 이름은 알고 있어. 준이지? 몇 살이야?”
식당까지 안내한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이 아이도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새로 온 사람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예우인지도 모른다. 악수를 청하는 진아의 손을 잡고 두어 번 흔들며 얼굴을 다시 쳐다봤다. 생끗 웃을 때 보조개는 깊게 패였는데 아마도 그 얼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열일곱 살. 너는?”
“나도 열일곱 살. 그런데 ‘너’라고 하지 마. 앞으로는 꼭 이름을 불러줘. 진아야, 라고 하면서. 알았지? 그럼 우리 친구하는 거다.”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낯선 요구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우리는 꼭 ‘야’라고 했다. 아마도 우리는 ‘야1’, ‘야2’, ‘야3’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 자리에는 곧 다른 친구들이 들어왔고, 이전의 친구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다른 야1, 야2, 야3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들의 다른 ‘야’가 되어 곧 잊혔고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됐다.
진아는 다른 친구들을 병실로 데리고 왔다. 또래 여자애의 이름은 은정이, 남자는 찬이였다. 찬이는 열여섯 살이고 은정이는 진아 그리고 나와 같은 동갑이라고 했다.
“진아가 너 찍은 거 같은데? 앞으로 조심해. 킥킥.”
“난 찬이, 앞으로 형이라고 할게. 반가워.”
은정과 찬이는 인사를 나누고는 드라마를 봐야 한다며 곧 자리를 떠났다. 진아만 내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말을 걸며 조금은 귀찮게까지 굴었다.
“나도 상처 있어. 이거 봐. 하나는 중2때 그은 거고 다른 하나는 4개월 전, 그러니까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그은 거야. 그래서 우리 꼰대가 날 여기에 가둔 거고.”
“힘들었겠구나.”
“깔깔깔~. 힘들었다니. 그냥 살기 싫었어. 집도 잘 살고, 어릴 때부터 함께 지냈던 새엄마도 친절했고. 근데 그냥 중학생이 되면서 모든 게 허무해지기 시작하더라. 학교도 중2때 그만뒀어. 아는 오빠들이랑 노는 것도 몇 달 안 되서 지겨웠고, 연예인 쫓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또래 애들은 공부다 옷이다 팬클럽이다 해서 바쁘게 지내는데 난 집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나도 그랬어. 고등학교도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원하는 학교가 아니었거든. 아버지와의 사이는 작은 일들로 계속 틀어졌고 그냥 집에 있는 게 싫었어. 한 달 전쯤 방학하자마자 가출했고 화원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아버지한테 잡혀 와서 결국엔 이곳으로 오게 된 거야.”
“우아, 공부 잘했었나봐. 모범생이 그러면 안 되지. 그래도 준이는 많이 힘들었겠네. 왜 그랬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명하자면 길어. 나중에 천천히 말할게. 그보다….”
「딩동댕」
그 때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분주한 소리가 현관 밖에서 났다.
“무슨 일이지?”
“약 먹을 시간이야. 약 먹으면 바로 자게 되어 있어. 수면제를 넣거든. 그렇다고 안 먹다가 걸려서 매 맞기 일쑤니깐 그냥 먹고 자는 게 나을 거야.”
“아직 9시도 안 됐어.”
“이곳 규율이야. 적응해야지 어쩌겠어. 아무튼 내일 보자.”
진아는 먼저 병실을 나갔다. 기계 소리에 재깍 반응하는 태엽 인형 같았다. 곧 그녀를 따라 나섰는데 간호사실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진아는 은정이와 함께 맨 앞쪽에 서 있었다.
“홍용길! 자 이거 먹고 병실로 가서 얌전히 자는 거 알죠?”
“윤경학! 아니 이 사람 어디 갔어? 빨리 나오라고 해!”
자신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람들 신경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수간호사의 목소리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앞으로 몇 년 동안, 수백 번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껏해야 2~30명인데 이상하게 시간이 길다고 느껴져 사람들이 약을 먹는 모습을 살펴봤다. 호명된 사람은 맨 앞으로 나가 수간호사가 주는 약을 먹었다.
“아~ 해봐.”
수간호사 옆에 서 있던 푸른색 옷을 입은 남자는 약 먹은 사람들의 입에 손전등을 들이대 입안 곳곳을 확인했다.
“혀 올려봐, 다시 내리고. 그래 됐어. 이제 가서 그만 자.”
수간호사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사람들은 병실로 갈 수 있었다. 그때 진아를 부르는 수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아, 오늘 말썽피웠지? 내일 선생님께 보고할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어서 먹고 네 방으로 들어가!”
아무리 진아라도 간호사가 이름을 저렇게 부르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거의 맨 뒷줄에 서 있던 나는 약을 먹고 병실로 들어가는 진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갑자기 고개를 돌린 진아와 눈이 마주쳤는데 진아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잘 자’라고 입 모양을 지어 보인 뒤 손을 흔들며 병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약 먹는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이미 휴게실 주변엔 전등이 꺼졌고 비상등 몇 개만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저 약 먹기 싫겠지? 그래도 먹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 꼴이 나지. 흐흐흐, 안 그래?”
갑자기 음침한 목소리가 혼잣말하듯 내 뒤에서 들렸다. 60대는 넘어 보이는 주름을 한 할머니가 혼자 중얼거렸는데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기쁨이라고는 경험해 보지 못한 분위기를 풍겼다. 놀란 나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줄의 맨 뒤로 갔다.
그 할머니가 약을 먹을 차례였다. 컵에 물을 따르는 간호사를 밀치더니 갑자기 “내 약 빨리 내놔!”라고 고함을 질렀다. 간호사가 의자 뒤로 넘어지면서 ‘쿵’하는 소리가 났고, 바닥으로 떨어진 스테인리스 컵은 몇 번을 반복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병동은 아수라장이었다. 할머니의 작은 체구에서는 엄청난 힘이 나오는 듯했는데 푸른색 옷을 입은 남자 두 명과 간호사 한 명이 겨우 잡아 병실로 끌고 갔다.
나머지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그 중 한 젊은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발작했다. 머리숱은 거의 없고 비쩍 마른 그 남자는 커다란 눈을 굴리며 허공에 마구 손짓을 한 채 소리를 계속 질렀다. 옆에 있던 또 다른 한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곳이 정신병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특별한 아카펠라를 듣는 듯,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그 잡음은 여러 사람을 거쳐 특이한 화음을 내며 복도로 계속 울려 퍼졌다.
혼자만 남은 수간호사가 사람들에게 약을 줬다. 곧 내 이름이 불렸고 결국 나도 약을 받아먹었다. 물을 아주 조금, 컵에 거의 입을 대지 않고 마셨다. 역겨운 느낌이 솟아올랐다. 컵 하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침을, 그것도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체액을 입술에 닿게 하는 건 에이즈나 에볼라 바이러스를 뿌려대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방금 바닥에 떨어졌던 컵인데 씻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 물을 마시게 한다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다. 이 사람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이렇게 반말을 하고, 함부로 대하고, 개한테나 먹일 음식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천대받는 가련한 사마리아인 같았다.
“아~ 해봐.”
수간호사는 작은 손전등으로 내 입을 살펴보았다. “혀 올려” 라고 무감각하게 말하는 그녀의 명령에 나는 마치 착한 개가 된 마냥 순종해야만 했다. 5초 정도 지나서 손전등은 꺼졌다.
“앞으로 그렇게 말 잘 들으면 문제없을 거야. 약도 잘 먹고 말썽만 안 일으키면 금방 퇴원하니까 좀 참아. 밤에는 돌아다닐 생각 말고. 이제 그만 가서 자.”
순간 그녀가 학교 선생님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인지 자동적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켜섰다. 병실로 걸어오면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똑같이 미쳐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낮에는 비어있었던 침대들마다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내 옆 침대에는 탁구채를 건넸던 그 남자가 자고 있었다. 이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여기 잠든 사람들이 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닌지 착각할만했다. 낮에 그랬던 것처럼 창가 쪽에서 코를 심하게 고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눕자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것처럼 나는 이곳에서의 첫날을 마쳤다.

“준이야, 일어나. 일어나봐.”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는데 침대 옆에 진아가 쭈그려 앉은 채로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나를 따라와. 어떤 소리도 내면 안 돼. 알았지?”
고개를 끄떡이고는 진아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중앙 휴게실로 가는 방향 반대편 복도로 천천히 가던 진아는 한쪽 문을 조심히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자 진아는 문을 닫았고 “불을 켜면 안 돼. 여기 가만히 서 있어. 금방 올게” 라고 말하고는 다시 나갔다.
방은 매우 좁았고 작은 창이 위쪽으로 나 있을 뿐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이곳이 창고라는 걸 알았다. 반대편에는 빗자루 몇 개와 마포 걸레가 세워져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철제 캐비닛 몇 개가 있었다. 남은 공간이라고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서너 걸음 안팎의 자리뿐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리고 진아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전등과 담배 그리고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남자들 군대 가면 신고식 하잖아. 대학엘 입학해도 그렇고. 여기에 준이가 온 것을 축하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아마도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축하받은 사람은 내가 처음일거야. 근데 공간이 너무 좁아.”
“이 방은 우리들만의 유일한 탈출구야. 담배는 여기 직원 아저씨한테 얻었어. 하루에 두개피를 얻는데 한밤중인 이 시간하고 오후에 간호사들, 직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 화장실에서 피울 수 있어. 하루에 단 두 번뿐이지. 자, 여기 담배.”
“담배 피워본 적 없어. 여기서 피우면 기침할 거 같아.”
진아는 소리가 안 나게 라이터를 켜고는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셨다. ‘후~’ 하면서 내 얼굴에 연기를 내뿜고 생긋 미소 지으면서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역시 내 생각대로네. 준이는 섹스해본 적도 없지?”
이렇게 가까이 내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문 채 웃고 있는 여자는 진아가 처음이다. 한밤중에 좁은 공간에 앉아있는, 전등에 비친 소녀의 얼굴은 달빛처럼 아름다웠다.
“나 아직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구. 그러는 진아는 해 봤어?”
당황한 감정이 몰려올 때 호기심은 일종의 지사제가 되기도 한다. 특히나 예민한 감정을 건드리는 자극을 멎게 할 때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만 있자 꼰대가 용돈을 끊어버렸어. 그래서 아는 오빠들이나 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들에게 몇 번 몸을 판 적이 있어. 여기서 담배나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구할 거 같아? 오후에 오는 남자 직원이 있는데 일주일에 두세 번 화장실에서 핸드잡을 해주면 그가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 줘. 요즘에는 나 대신에 은정이가 하고 있지만…. 더럽다고 생각하니? 적응 안 되지?”
“아냐,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만약 진아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어.”
“남자들이 여자를 찾는 것 때문에 여자들은 무언가에 대항할 무기가 생기는 거야. 감옥엘 가든 납치를 당하든 여자들은 남자보다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더 큰 거지. 그걸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리고 나 말이야, 준이에게 축하해 주려고 아까 약도 안 먹었단 말이야. 기특하지?”
“어떻게 안 먹을 수 있어? 방법이 있나봐?”
“성공할 확률은 반반이야. 먼저 약간의 물을 단숨에 삼키고 약을 목구멍 뒤쪽 식도가 시작되는 부분에 달라붙게 해. 바로 병실로 와서 기침하면 내뱉을 수 있어. 수면제는 미끈한 캡슐형이 아니거든.”
“나도 가끔 써 먹어야겠는걸.”
“뭐든 그렇듯이 연습이 좀 필요할거야.”
“너 꼭 우리 아버지같이 말한다. 하하하.”
“쉿~!”
웃음소리가 컸기 때문일까. 복도를 순찰하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서둘러 전등을 끄고 담배도 끈 후에 진아와 나는 숨을 죽였다. 뚜벅뚜벅. 가까이 온 발자국 소리에 맞추듯, 진아의 가슴이 팔에 닿아 자극된 내 심장 뛰는 소리도 크게 울린다. 발자국 소리가 반대편으로 돌아서자 진아는 우습다는 듯 내 볼을 꼬집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심장 뛰는 소리가 다 들리던데. 킥킥.”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음을 느꼈지만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대답했다.
“준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했지? 내가 가르쳐 줄까?”
“괘, 괜찮아. 그리고 여기선 불가능하잖아. 소리 나면 들킬 테고.”
“가만히 있어. 준이만 조용히 하면 돼. 알았지? 약속해.”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진아는 바로 내 위로 올라앉았다. 어정쩡하게 벽과 바닥에 걸터앉은 나는 진아가 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며 기억하자고 생각한다. 진아는 환자복 상의 단추를 차례대로 풀었다. 어둠에 비친 하얀색 브래지어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마저 벗자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뺨에서 보았던 연분홍빛 피부는 그녀의 가슴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코끝에서는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하는 여자의 향긋한 냄새가 퍼진다. 나는 이미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 손으로 진아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입으로는 돌출된 부분을 빨기 시작했다.
“안 돼, 그렇게 세게 빨면 소리 지를지도 모른단 말이야. 천천히, 살살해줘.”
나지막한 목소리. 그렇게 씩씩하던 진아의 음성은 떨렸다. 욕설을 내뱉던 입술에서는 더욱 강렬한, 그러면서도 조용한 음성을 내뱉었다. 진아는 내게 가슴을 물린 채로 바지와 팬티를 무릎 아래까지 한꺼번에 벗어 내렸다. 벗은 바지는 무릎 보호대가 됐다. 쭈그려 앉은 진아는 더듬거리며 내 바지를 벗겼다. 나는 동작을 멈추고 진아가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살짝 들어 그녀의 손짓에 순응하고야 만다. 진아는 곧 내 페니스를 찾았고 투명한 피부의 작은 손으로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넣을게. 처음엔 이상할거야. 절대로 소리를 내면 안 돼. 자, 내가 키스해줄게”
먼저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와 곧 내 모든 소리를 외부로부터 차단했다. 처음으로 느끼게 된 사람의 혀 맛이었다. 그 끝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짧았지만, 입 안 공간을 꽉 차지해 순간 두렵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의 타액이 목구멍을 흘러 넘어가는 순간에 느껴지는 역겨움은 금세 사라지고 쾌락만이 남는다.
혀는 달콤했지만 아랫도리에서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와 내 혀는 17년 전부터 살던 곳에서 뛰쳐나왔지만, 바깥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서 바싹 엉겨 붙은 채 체액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리의 혀는 보금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얼굴을 내밀었지만, 얼마 못 가 시작된 안으로부터의 고통 때문에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 아프고도 또렷한 긴장과 흥분의 반복. 그리고 곧이어, 무언가 이와 같은 것이 밑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잠시 뒤에 내 안으로 그녀가 ‘들어왔다.’ 아니, 이미 들어와 있었는지도….
천천히 진아의 혀가 ‘하나의 공간’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나는 고통과 안타까움의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혀의 감촉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뇌는 페니스의 모든 신경 반응들을 체크했다. 그제야 어떤 것이 더 절정에 다다를 수 있는지 알게 됐다. 진아는 허리를 움직였고 난 가만히 구부려 앉은 채로 다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젖어 있던 진아의 그곳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그것은 마치 녹슨 못에서 나는 냄새와도 같았다.
입술을 잔뜩 깨물고 한 치의 신음도 바깥으로 새지 않게 하느라 순간순간 내 페니스의 신경이 오그라든다. 그때마다 후각으로 밀려들어오는 한 여자의 특이하고도 향기로운 체취, 한없이 좋아질 것만 같은 땀 냄새는 진한 자극이 됐다. 진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전등에 비친 그녀의 입은 꼬옥 다물어져 있었고 한쪽 얼굴은 묘하게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마치 아름다운 황소에게 욕정을 느끼고 관계를 한 파시파에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정신병원, 탁구, 그리고 첫 경험. 최소한 이 세 단어는 다른 어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으리라는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 사정했다. 내 안에서는 마치 지렁이와 같은 것들이 페니스의 통로를 따라 기어나가고 있었고 그 움직임 때문에 다른 기관들은 모두 멈춰버린 듯했다. 다시금 밀려온 진아의 기나긴 혀는 비명을 지를 뻔한 내 기도를 막아버렸다. 정신은 거기서 멈춘 것 같았다. 진아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다음 호에 계속>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