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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유독 눈이 내리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해발 1,950m 높이의 한라산 정상과 주변의 수많은 오름들에도 눈 쌓인 날이 드물었다. 한라산에 눈이 쌓이지 않은 건 유사 이래 처음이라며 벌써 가뭄을 걱정하느라 호들갑이었다.
남자는 일상을 잘 살아 내고 있었다. 남자의 하루는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반복적이었고 규칙적이었다. 아침 6시면 기상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쓴 뒤 아침밥을 차린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은 후에는 정원을 가다듬고 2층에 있는 황토방으로 가서 온종일 머물렀다. 따뜻한 날씨 덕에 황토방을 만드는 일은 겨우내 순항해 이제 막바지 작업 단계에 이르렀다. 다락을 없애고 평평하게 한 옥상에는 평상을 놓고 한쪽에 빨래를 널 수 있게도 했다. 다른 한쪽에 마련한 황토방은 10평의 작은 원형집 모양새를 갖췄다. 천장에는 12자 길이의 서까래를 틀었고, 바닥에는 구들도 깔았다. 화장실도 세면대도 없는, 순전히 방의 역할에만 충실한 공간이다. 남은 작업은 이미 짜 놓은 창틀과 문틀을 마감하고 지붕에 환기구를 설치하는 과정뿐이다.
남자에게 변화가 있다면 주일 저녁마다 노형동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개종할 생각은 여전히 없다면서도 미사에 참석하면 순종을 배우고 마음이 평안해져서 좋다고 했다. 매월 마지막 주마다 하는 청년떼제미사를 유독 좋아했다. 성당에 다녀와서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서 귀찮게도 했다.
나는 취업했다. 남자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마을이 설립한 리립(里立) 박물관인 조랑말체험박물관 기획팀에 입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장에 취직해 조직 생활을 한 소감이라면, 교회의 위계질서보다는 숨 쉬기에 낫다고나 할까. 이곳 박물관장은 육지에서 문화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제주로 귀촌한 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제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문화 예술인들의 창작 마을로 유명해진 가시리에서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 행사를 기획하는 일에 재미를 느꼈다.
그날 사건은 물론 남자에게 말하지 못했다. 여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퇴근한 저녁이면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 유혹을 참아내고자 애면글면했다. 그럴 때면 남자와 함께 황토방 작업에 몰두했다. 그제야 남자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정원을 꾸미고 집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이유를 알았다. 지난한 일상을 외롭지 않도록 견디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과업이었다.
정국은 올해 말, 12월 20일 치러질 19대 대통령 선거로 벌써 떠들썩하다. 여권은 국제연합기구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씨를 영입하는 데 성공, 이제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야권은 지난 선거에서 여자에게 졌던 문재인 전 대표를 다시 내세웠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안철수 의원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적극적으로 그를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보였지만, 대중은 경제와 여자에 이어 세계화라는 명분에 넘어갈 것이다. 우리 국민은 여자 대통령 때문에라도 철이 들어야 한다. 서민 경제 활성화니 증세 없는 복지니 하는 돈놀이와 이미지 놀음에 현혹돼 나라를 팔아먹은 건 우리다. 허경영 씨는 일찌감치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무조건적 구속과 2012년 대통령 선거의 부정 및 세월호와 국정원과의 관계 수사, 결혼 수당 5000만 원 지급, 정당정치 해산, 몽골과의 국가 연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세계화에 쏠린 대중의 관심사를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후보였다.
에로스가 영원하지 않듯 밀월 관계로만 엮인 권력 따위도 영원할 수 없다. 매일 보는 뉴스에서 빠진 소식, 정치인들의 정권 획득이라는 집착에서 유일하게 빠진 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재작년 간통죄 위헌 결정 이후 사회는 점차 재미지게 흘러가고 있다. 흥신소는 날마다 성업 중이고 가뜩이나 높았던 이혼율은 70%대까지 치솟았다. 동거, 사실혼 관계에 있는 남녀들이 많아 관련 복지 체계를 마련하는 데 미혼인 여자가 나섰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을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이면서도 칙칙해진 삶을 즐겁게 보내라는 뜻일게다.
경북 구미시에서는 칠십 먹은 한 할머니가 명절마다 현물로 바꿀 수 있는 현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애(令愛) 가운데 가장 아꼈을 막내딸을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아직도 우리 어머니 아니 할머니 세대까지는 여자가 몸을 주면 마음도 준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전쟁통에 이어 극심한 가난을 살아낸 할머니, 성장주의에 물든 시대에 조신해야만 했던 어머니,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 문화를 좇는 딸들은 전통적인 것들과의 결별만이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고 믿게 됐다. 어머니 세대만 보더라도 남편이 벌어오는 돈이 많을수록 몸이 호사를 누린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뿐인 몸을 소중하게 썩히는 것보다 하나뿐인 몸을 놀리면서 수입이 많아지는 일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스스로 이쁘다고 착각하거나 예뻐져야 한다는 본능이 한몫 거든다. 줄 수 있는 몸은 하나다. 하지만 돈은 그 범위가 무제한이다. 내 것이 될 수 있고 네 것이 될 수 있는 게 돈이다. 몸을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 7만 원에서 수백만 원, 심지어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노후 대비를 할 수 있다. 하나뿐인 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지지리 궁상을 떨며 손으로 몸을 자극하는 것보다 편하게 즐기며 사는 삶이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해 효율적이지 않는가. 지극히 동물경제적 논리이지만,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를 구하러 대낮부터 길거리에 나앉고 저녁에는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며 주말이면 등산을 떠나 내연남을 만들고 이혼을 정당화한다.
물론 이런 여자들일수록 남자 대부분이 비슷비슷, 고만고만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전쟁 때문에 남편을 잃고 회사에 남편을 보내고 다른 여자에게 남자를 빼앗긴 딸들이 무얼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할머니, 어머니, 딸 모두 피해자에서 이제는 피의자로 남은 삶을 살고자 인생 역전을 꿈꾸고 있다. 산업화 시대가 만들어 낸 볼품없는 우리나라 여성상은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겠다거나 황혼 이혼을 선택하는 그 지독한 결심을 한 이유는 결국 불행한 가정사, 불운한 국운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든 이혼하든 성욕은 어떻게 풀고 해산할까. 원초적으로 남성적이라 그런 하등한 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건지, 타락한 사회가 성적 정체성을 중성으로 고안해 낸 건지는 모르겠다. 이런 나라에서 ‘노처녀’로 늙은 여자가 대통령이라니.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은 국민과 영토, 주권을 대표하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또 나가?”
“응, 저녁에나 올 거야.”
며칠 전부터 외출이 부쩍 잦아진 남자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을 먹고는 허겁지겁 서둘렀다. 새벽부터 손수 30인분의 김밥을 말더니 대형 찬합에 과일과 함께 담았다. 과자와 음료수도 한 보따리 준비했다.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또 캐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덕분에 정원 가꾸기도 내 몫이 됐고 황토방을 마감하는 일도 내 차지가 됐다.
“너 여자 생겼어? 요즘 수상해.”
“여자 맞아.”
“뭐라고? 누군데?”
“엄밀히 말해서 여자들이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다시 그 과거, 진저리치던 밑바닥으로 돌아가려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했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미아는 어쩌고.”
“같이 갈래?”
“어딜?”
“궁금하면 빨리 옷 갈아입어. 자, 여기 짐이나 드시게.”
남자는 얼마 전 거금을 들여 마련한 전기차 BMW i3에 짐을 실었다. 올해부터 제주도에서는 전기차만 운행할 수 있는데 운이 좋게 2300만 원이나 보조금을 받아 산 차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보조석에 올라탔다.
시내를 벗어나 서부 해안도로를 탔다. 애월의 바다는 언제 봐도 푸르고 깊다. 한림의 바다는 좀 더 초록빛을 띠고 더 깊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지 않았다. 협재는 달랐다. 에메랄드 빛을 머금은 하얀 백사장, 깊이 들어가도 잠길 것 같지 않은 바다다. 관광객이 몰리는 이유가 있다. 금능리 초입에서부터는 오름이 보이는 산간 길을 탔다. 10분도 채 가지 않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나타났고 생각하는 정원도 지나쳤다. 전기차는 청수마을회관을 못 미쳐 ‘애서원’이란 간판을 끼고 작은 산길로 들어갔다. 회색 철문 앞 주차장에서 차는 멈췄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들어가 보면 알아.”
자줏빛으로 도색된 오래된 콘도형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남자 말대로 온통 여자들만 있었다. 사무실 직원도 여자들이었다. 남자를 본 한 직원이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 선생님, 오늘도 오셨네요. 옆에 계신 분은?”
“같이 사는 친구입니다. 저 따라서 집 짓는 일을 도우려고 왔습니다. 인사드려, 용성아. 여기 사무국장님이셔.”
집을 짓는다니? 진즉 그런 일이라고 말했으면 더 편하게 입지 않았겠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박용성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저는 힐라리아 수녀입니다.”
사무국장이라는 여자는 60대 초반의 수녀였다. 혹시나 알아볼까 싶어 걱정했지만, 그런 눈치는 없었다.
“저희 시설에 대해서 아시죠?”
“네? 네….”
“아시다시피 저희는 미혼모들의 쉼터로 연구와 보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성당을 통해 소개받은 이 선생님께서 여성 건강에 좋은 황토 찜질방을 지어 주고 계세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슬쩍 곁눈질하자 남자는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별것 아니지만 함께 드시라고 준비했습니다.”
“매번 올 때마다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작업을 시작해야죠.”
남자는 준비한 음식 꾸러미를 사무국장의 손에 쥐여 주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까닥했다. 뒷문을 나서니 나지막한 뒷산과 연결된 길 앞으로 작은 공터가 보였다. 그 한쪽에 또 다른, 이제 막 골격을 갖춘 황토집이 나타났다.
“뭐야, 진작 운이라도 띄워주지. 상의 한마디도 없이. 좋은 일 하네?”
“재능 기부야. 노형동 성당 주임신부님과 이야기하다가 소개받았어.”
“그렇다고 밥까지 싸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잖아.”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냐. 섭섭해서 그렇지.”
“너 요새 살림 좀 하더니 꼭 안사람처럼 말한다.”
“그… 그런가. 하하.”
남자도 따라 웃고는 장갑을 끼고 황토로 벽을 쌓기 시작했다. 집 옥상의 황토방과는 구조나 시설이 일치했지만 구들장이 달랐다. 세 시간여 작업을 진행하니 식사를 하라고 사무국장이 불렀다. 40명은 족히 넘을 여자들이 대형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자가 준비한 김밥과 과일, 음료수는 각자 덜어 먹을 수 있게 한쪽에 따로 있었다. 10대부터 우리 또래의 여자들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는데 대부분 임신한 상태였고, 일부는 갓난아이를 안은 채 밥을 먹었다.
남자와 나는 사무국장이 미리 준비해 둔 안쪽 자리에서 따로 밥을 먹었다. 제주산 고사리 볶음과 갈치 튀김, 톳 무침, 집에서 직접 담근 것 같은 깍두기 그리고 미역국이 전부였지만, 집 밥처럼 맛이 훌륭했다.
한창 밥을 먹던 남자가 갑자기 불안해했다. 밥알 하나 안 남기고 깨끗이 먹는 사람이 갑자기 수저를 놓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여자들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열심히 밥만 축냈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황토집에도 없었다. 차로 가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그제야 남자는 현실 세계로 돌아온 듯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별… 별일 아니야. 오늘은 그냥 집에 가자.”
“너 왜 그래? 황토 반죽 저렇게 두고 가면 굳잖아. 수녀님께 인사라도 해야지.”
“괜찮아, 그냥 가자. 오늘은 그냥 가자.”
남자는 집에 오는 내내, 집에 와서도 말 한마디 없었다. 자기 방으로 쑥 들어가더니 음악을 틀고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이유를 알 수도 물을 수도 없었지만 나까지 가슴이 먹먹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남자는 애서원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깊은 우울증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정원 손질도 옥상 황토집 다듬는 일도 책을 읽고 마트를 가는 일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멍하니 앉아 정원을 보고 생각에만 잠겼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나중에 대답하겠다고만 할 뿐이었다.
제주의 3월은 바람이 알려 준다. 바다를 머금거나 산을 타고 내리는 바람이기에 온도 차이는 계절마다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만 바람이 머금은 향기가 달랐다. 바다를 타고 오는 해풍은 멀리 떨어진 해수를 소식을 전했고, 산을 타고 오는 산풍은 녹기 시작한 눈과 얼음의 소식을 전했다. 육지와 달리 직접 바다와 산으로부터 온 바람이기에 그 향기는 짙을 수밖에 없다.
사흘간 요동도 하지 않던 남자는 봄바람을 느끼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힘을 얻은 듯 슬슬 움직였다. 오전에는 먼저 장을 봐서 이미 똑 떨어진 김치를 담갔고 오후에는 정원에 나가 그새 자란 잡초를 뜯었다. 며칠 걱정하게 해 미안하다며 저녁에는 말고기 로스를 구워 먹자고 했다. 남자는 취재할 때 인연을 맺었다는 말고기 전문 식당 고우니에 가서 로스와 곰탕을 얻어 왔고 나는 텃밭에서 딴 상추와 고추를 씻고 밥을 준비했다.
날이 따듯했기에 정원 앞 탁자에 상을 차렸다.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한라산 소주를 한 잔 따라 마실 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싶어 대문 쪽을 슬쩍 쳐다봤다. 남자 역시 소주잔을 손에 든 채 시선은 대문을 향해 있었다.
‘똑, 똑.’
짧고도 약하게, 다시 대문이 울렸다. 검은 대문 너머로 갈색 형체가 머물러 있는 게 보였다. 술잔을 내려놓은 남자는 천천히 대문으로 향했다. 몰래 든 도둑을 잡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잔을 조심스레 받쳐 들고자 하는 몸짓이었다. 남자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대문을 열었다.
여자가 강림했다. 청색 빛이 도는 보라색 단발머리도, 노란색도 아닌 처음 봤을 때의 빛바랜 갈색 머리 그대로다. 왼팔로는 부른 배를 지탱하고자 허리춤에 대었다. 오른팔 아래에는 분홍색 천으로 된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검은색 백팩을 멘 여자의 눈은 시선을 피하려고 내리깔았지만, 우리를 지켜보는 게 분명했다.
마주한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않고 서 있었다. 둘 다 소금기둥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서 굳어져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는 듯 바라만 봤다. 떨리는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드… 들어와, 미아야….”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리 없는 울음은 서서히 흐느낌으로 변했고, 얼마 못 가 몸 전체가 들썩였다. 남자는 울고만 있는 여자의 오른손을 잡고 안으로 오게 했다. 여자는 거부하는 일 없이 홑몸이 아닌 육체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용성아,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먹자. 찬바람은 안 좋을 거야.”
계속 울기만 하는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도 않았다. 나는 대문에 놓인 여자의 짐을 챙긴 뒤 불판의 불을 끄고 고기와 반찬들을 주방 탁자로 옮겼다. 남자는 자기 방으로 여자를 안내한 뒤 저녁거리를 함께 옮겼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기다린 대로 미아가 왔잖니.”
“나는 모르겠다. 네 집이니깐.”
주방에서 저녁상을 다시 차렸다. 남자는 고기부터 굽고 곰탕을 다시 데우고 난 뒤 밥 한 그릇을 더 뜨고 수저 한 벌을 더 꺼내 식탁을 정돈했다. 그리고 방으로 가서 여자를 불렀다.
“미아야, 밥부터 먹자.”
방 안에서 여자가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가자 문 옆으로 다가가 대화를 엿들었다.
“미아야, 일단 밥부터 먹자. 괜찮아.”
“생각 없어… 흑흑….”
“울지 말고. 너무 울면 아이한테 좋지 않아. 이제 걱정할 것 없어. 미아가 태어난 집이야. 편하게 지내도 되는 곳이잖아.”
“흑흑….”
“우리 제주도 처음 함께 왔을 때 말고기 로스 먹었던 것 기억하지? 맛있다고 잘 먹었잖아. 마침 오늘 사 왔거든. 가서 조금이라도 먹자.”
한참 동안 달래던 남자는 결국 여자를 이끌고 주방으로 나왔다. 셋이 되자 다시 어색했다. 남자는 말없이 여자 밥그릇에 고기를 얹어 주고 또 얹어 줬다. 말고기 곰탕 국물도 억지로 떠먹게 했다. 울음을 그친 여자는 오랜만에 육식을 하는지 슬픈 사람치고는 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다.
한마디 말도 않고 식사를 먼저 마친 여자는 다시 남자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방에 이불을 깔고 평소 틀지도 않던 난방을 하고 여자의 짐을 정리한 뒤 문을 닫고 나왔다. 덕분에 나는 설거지에 음식물 쓰레기 정리에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평소 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여자 앞에서 자존심도 상하는 것 같았고 뭔가 께름칙했다. 그 누구도 몸에 쓰레기를 달고 살지 않는다. 버릴 뿐이다. 그런데 정신 속 쓰레기, 기억의 잔해들은 버리질 않고 간직하는 이유는 왜일까.
우도 땅콩과 깍두기를 놓고 술상을 펴자 남자가 와서 앉았다. 여자 앞이라서 못 한 회포를 이제 풀어야 한다는 듯 우리 둘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우리도 곧 말을 잃었다. 생각할 것들이 갑자기 많아진 탓이리라.
“오늘은 내가 거실에서 잘게.”
“집주인이 왜 그러냐. 내가 잘게.”
“아니야, 미아 상태도 봐야 하니까 거실이 편할 것 같아.”
“그렇지….”
남자는 저런 처세술, 삶의 기술 들을 어디서 배운 걸까. 성당에서만 살았던 나로서는 부러웠고, 부끄럽기도 했다.
“미아가 여기서 생활하는 거, 불편하지 않지?”
“나는 괜찮아도 쟤가 불편하겠지. 조만간 방을 구해볼게.”
“미아에게는 내가 말할게. 우리 셋이 같이 지내자. 진심이야.”
“그래도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임신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차마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몸으로 성매매를 했다는 것도, 여자를 본 적 있었노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날 애서원에서 미아를 봤었어.”
“정말? 그랬구나. 원래 알았던 거야?”
“아니…. 용성이 너랑 갔던 날, 밥 먹다가 우연히 봤어. 식당 맨 구석에서 따로 떨어져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싼 김밥을 먹는 모습을….”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고, 참았던 눈물을 그제야 흘렸다. 두루마리 휴지를 건네고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술은 그만 마시자고 했다. 술상을 치운 후 남자는 소파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자기 생각을 보는 듯했다. 여자가 있는 방은 고요할 뿐이었다. 잠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어서 방에 들어와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꺼내 들었다.
다음날 새벽, 여자가 또 떠났을까 싶어 일찍 눈이 떠졌다. 주방에 가니 남자는 그새 어디서 구했는지 선지와 무청, 소 내장 들을 넣고 해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평소 즐겨 먹는 것과 달리 맵지 않게 했다. 그 좋아하는 청양고추도 넣지 않았다. 밥은 보리와 콩, 찹쌀, 팥, 조 등 곡식뿐 아니라 대추와 밤까지 좋다는 것은 몽땅 넣고 압력솥에 쪄냈다. 봄동으로 겉절이를 담갔고 계란말이도 했으며 심지어 탕수육도 있었다.
“아침부터 웬 탕수육이야?”
“미아가 탕수육을 제일 좋아하거든.”
“난 한 번 해준 적 없으면서…. 참 지극정성이다. 너무 극성맞은 거 아니야?”
나는 혹 여자가 잠에 깨 있을까 소곤대며 핀잔했다.
“미아가 얼마나 고생 많았겠어. 출산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몸보신 해야지.”
“일어났어?”
남자방 아니 이제는 여자가 차지한 방을 얼굴로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밤새 잠을 잘 못 잔 것 같더라. 새벽에야 잠들었어. 그리고 미아, 원래 아침잠이 많은 스타일이야.”
함께하는 만큼 상대를 알아가는 정도가 비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짧았어도 남자는 여자를 잘 알았다. 그만큼 그 사랑이 깊고 크다는 뜻 아니겠는가. 나 역시 여자와 하룻밤 함께했고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도 했지만, 여자의 일상은 몰랐다. 그래서 지루해도 일상이 소중하고 징글징글해도 가족이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은 지켜질 수 있는 법이다.
열심히 음식 준비하는 남자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치우고 설거지하는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집 밖으로 나가 한 시간가량 산책하고 왔더니 여자는 샤워를 마쳤는지 물기 머금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모텔에서, 호텔에서 봤던 모습이 떠올랐는데 죄책감은 내 안에서 생겼다. 표정이나 인상은 그나마 좀 편해 보였다.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랐지만, 이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잘… 잤어?”
“응….”
“몸은 어때?”
“괜찮아.”
“자, 용성이도 왔으니 아침 먹자.”
남자가 우리 사이에 껴들었지만, 이는 납득할 만한 간섭이기도 했다. 한상 푸짐하게 차린 덕에 아침부터 포식했지만 대화는 없었다. 여자는 어제처럼 왕성한 식욕을 자랑했다. 홑몸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자주 많이 먹어야 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식사를 마친 뒤 여자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고 남자는 우엉차를 끓였고 나는 뒷정리를 했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반복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 과거를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나부터 말하기로 결심했다. 옷장 밑에 숨겨둔 여자의 스마트폰과 외투 그리고 카메라를 꺼냈다. 차를 마시던 남자는 카메라 가방을 보자 어찌된 일이냐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잠시 나가자. 할 말 있어.”
남자는 여자에게 집 근처 마트에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집 앞 홀천 다리 입구에 있는 정자에 앉아 작년 가을, 민들레에서부터 시작된 기묘한 인연에 대해 전부 이야기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남자는 딱 한 가지만 묻는 것이었다.
“용성아, 네가 보기에 그날 사건으로 인해 미아에게서 악한 영이 빠져나간 것 같니?”
“정확히 모르겠다. 그날도 역시 도망쳤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면 좋은 신호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대화라도 하면 좀 더 알 수 있을 텐데.”
“지금 말한 건 미아에게 당분간 비밀로 하자. 아이까지 위험해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나 궁금한 것 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궁금해.”
남자 역시 내 아이인지 자기 아이인지 혹 제삼자, 얼굴도 모르는 뜨내기의 아이인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아이가 됐든 상관이 없다면 밝힐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니 여자는 거실에서 카메라를 만지작하고 있었다. 스마트폰과 외투는 이미 챙겨뒀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는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불알 사진전이 생각나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사진 못 찍어서 얼마나 답답했니. 몸 괜찮으면 드라이브도 하고 사진도 찍을까?”
남자의 말에 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그 자조적이고 보리수 껍질 같은 비웃음은 탈각됐다. 눈에서는 독기도 사라졌다. 대신 천진난만한 미소가 얼굴에 새겨졌다. 그 미소 하나로 여자를 지배했던 악한 영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상처가 생기기 이전, 아빠의 따듯한 품이 남아 있는 고향 집으로 돌아와서, 다 알고도 받아 주는 아빠 같은 연인과 상봉한 지금에서야 비로소 평안을 찾게 된 걸까. 아이가 아니라 갑자기 훌쩍 커버린 소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동정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처녀가 이제야 만개한 것이리라. <다음 호에 계속>
by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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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여자가 대통령이다’는 여성을 대표할 수 없는 한 여자의 유령이 한 나라를 집어삼킨 현재, 이 시대를 살아 내는 한 민초 여자와 동갑내기 신부 박용성, 경마 기자 이영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재소설입니다. 작가는 “간통죄가 합헌이어도, 여자는 위헌”이라며, “우리를 대표한다는 대통령에게, 우릴 창조한 신에게만 유죄라고 통보한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