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시작 #7] 피들로 범벅된 하늘, 그 하늘이 우연을 열어 줬어

↑	그 하늘이 어땠는지 알아? 온통 붉은 핏빛이었어. 하늘에서 누군가 칼에라도 찔린 듯 흐트러진 피들이 파란 하늘을 뒤덮는 것 같았지. 한 명만 찔린 게 아니야. 아마도 수십 명은 될 듯 해. 내 눈으로 확인한 색들이 그랬으니까. 아주 연한 색부터 짙은 자주빛까지 전부 다른 색의 피들로 범벅된 하늘, 그 하늘이 내게 우연을 열어 줬어

5. 존재의 이름

모든 것이 하얗다. 발이 닿은 곳은 한없이 깎아진 절벽과도 같다. 무언가에 떠밀려 붕 떠 있는 느낌이다. 공중에 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진공상태의 어떤 공간에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 뒤로 넘어가는 시큼한 침 냄새도 느끼지 못하자 두려움이 밀려온다. 난 죽은 것일까 하는 신호가 전달됐고 아마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을 -누군가에게- 돌려보낸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스쳐갔던 상황이 무의식중에 남아 꿈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생활은 똑같이 반복됐다. 눈 뜨고 나서는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탁구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때운 후 다시 밥을 먹고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마지막으로 약을 먹고 바로 잠이 드는. 나도 그들과 같은 일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겨우 사흘이지만, 이 무료한 생활은 일 년이나 지난 듯하다. 시간과 공간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심지어 다른 세계까지도 한꺼번에 뭉뚱그렸다. 한여름엔 겨울을 동경하고, 겨울이 어느 정도 지나면 지난여름을 그리워하는 사계절을 가진 사람들처럼 나는 이제 무언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 자유 시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또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이곳 사람들의 특별한 모습이 이제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지금 이곳을 나간다면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다.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시간도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되리라. 이곳에서 가장 어린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털어놓는 시간을 진지하리만큼 기대했고 사랑했다. 오늘은 내 차례다. 아침을 먹는 내내 무엇을 얘기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가출했던 이야기나 하자고 마음먹는다.
“자, 오늘은 준이 차례야. 벌써 기대되는데? 공부 얘기 말고 재밌는 거로 해줄 거지?”
진아는 항상 환자복 상의 대신 자신이 입고 싶어 하는 면티 같은, 집에서 가져온 것들만 입었다. 오늘은 나비 무늬가 들어간 자주빛 반팔티를 입었는데 몸에 착 달라붙어 가슴이 더욱 도드라졌다. 눈길이 그곳에 머무르자 진아는 ‘어딜 봐’라는 표정을 지으며 짓궂게 내 팔을 살짝 꼬집는다.
“준이형, 점심 먹기까지는 한 시간 반이나 남았으니깐 천천히 얘기해줘.”
“다들 조용히 하고. 자, 시작~.”
모두를 조용히 시킨 후 진아는 이야기를 시작해도 된다는 듯 나를 한 번 쳐다봤다. 마치 큐 사인을 보내는 것과도 같다. 팔짱만 낀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은정이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은정이는 브라운색 긴 머리를 뒤부터 크게 땋아 위로 묶어 긴 핀으로 고정했다.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이자 내가 그녀를 가장 흐뭇하게 바라볼 때의 모습이다.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생각이 났다. 아주 작은 문제들은 급할 때마다 튀어 올랐고, 나는 항상 원했던 것이 아닌 정반대를 선택했었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난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생각이 들었다는 건 누군가가 우리를 일깨워 준 것이다. 그녀와 헤어진 이유도, 그 이후로 내 모든 현재도 결국은 사소한 선택의 결과다.
“으응, 대단한 얘기는 아니야. 그냥 첫사랑 얘기…. 앞으로도 그런 사랑 못 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마지막 사랑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네.”
“뭐야, 준이는. 그럼 난 어쩌라고?”
“진아야, 너 너무 오바하는 거 아냐? 준이 만난 지 이제 사흘밖에 안 됐다구.”
“상관없어. 나 준이 처음 봤을 때부터 필이 팍 꽂혔단 말이야. 준이는 안 그랬어?”
자신의 말을 인정해줘야만 해야 한다는 눈빛으로 진아는 나를 쳐다봤다.
“어디서 많이 봤다는 느낌은 들었어. 은정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은정이를 봤을 때보다 진아를 봤을 때 그 느낌이 더 강했던 건 사실이야. 데자뷔라고 하지? 난 단순한 뇌의 착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진아가 내 이상형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감정이 처음엔 없었거든. 근데 정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은 확실해. 너무나 낯이 익어. 진아를 처음 봤을 때, 욕하는 진아를 보고 우울한 느낌을 받았거든. 미래나 내세에 대한 믿음이나 지향성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일지도 몰라.”
“아무튼 이상형은 아니라니까 다행이네. 진아야, 나 준이한테 데시해도 되겠지?”
“안 돼. 우린 이미 살을 나눈 사이라고.”
“뭐야, 너. 전엔 아니라며? 준이, 정말 사실이야?”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은정에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얘기로 싸우지 말자. 자, 얘기 시작할게. 잘 들어줘. 재미없으면 없다고 말하고.”
나는 가운데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믿고 싶어. 진정한 사랑은 어린 나이일수록 가능하다고. 세련되지 못하고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 장애물이 많다는 문제만 없다면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될 거야. 어린 나이라고 해봤자 천재들이나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늦은 14살, 15살인 거야. 바보들이나 어른이 된 후에 그 나이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하지. 그 나이 때는 한참 배워야 한다느니, 생각의 폭이 작을 수밖에 없다느니 하면서 바보들이 겪은 경험들을 천재들에게 주입시키려고 해. 분명 바보들은 대다수이고 천재는 극히 소수야. 대다수 천재는 자신을 믿지 못한 채 더욱더 우스꽝스러운 바보로 변질되지. 난 내가 14살 때 겪었던 사랑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다신 올 수 없을 만큼,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내가 천재고 어린 나이에 사랑을 못 해 본 사람들은 바보라고 말하려는 게 아냐. 단지 그렇게 말하려는 사람도 바보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바보일 뿐이지. 진정한 사랑은 어린 나이일수록 가능하다는 것이고 난 그 사랑이 14살 때 처음 왔었다는 것뿐이야. 그것뿐이라구.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중학교를 입학하고 이틀이 지난 날이었어. 같은 반 아이들은 이미 친구가 됐고 몇몇 장난기 많은 아이는 교과목 선생님들이 오실 때마다 복도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누가 온다고 소리를 치곤했지. 아마 점심시간이 되기 전이었을 거야. 수업종이 치고, 또 누군가가 선생님이 온다고 소리치며 교실로 달려 들어왔지. 그런데 그 순간 그러니깐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말이야, 내 몸 어디에선가 무언가가 쑥 하고 빠져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정말 이상했어.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은 느낌과는 달라. 껍데기가 탈피되는 느낌도 아니었고, 지금도 설명할 수가 없어. 난 곧잘 내 감정을 표현하기엔 어려운 경험을 하곤 하거든. 그러고는 멍한 상태가 계속됐지. 누군가가 교실로 들어와서 칠판에 이름을 쓰고 뭐라고 말하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눈에 보이는 것도 초점이 흐려진 채로 그대로 뿌옇게 있었지. 말도 할 수가 없었어. 키가 큰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동안 멍한 상태로 가만히 있자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내 짝이 흔들면서 뭐라고 하더군. 카메라 렌즈의 초점을 맞추듯 차츰 거리 조정이 된 내 눈에는 교탁 앞에 있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어. 분홍빛 얇은 원피스에 푸른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어. 안경을 끼고 있었고 어깨선까지 내려온 머리는 약한 갈색빛이 나는 롤 스트레이트 스타일이었어.
그 모습을 잊을 수 있을까? 가끔은 오래된 기억이 남아 있는 사진보다 더 선명할 때가 있는 법이야. 내가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 사람을 자각한 건 상당히 늦은 초등학교 5학년 때야. 하나의 연결고리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혼자 자취하는 삼촌이었지.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까 주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 거야. 그들 이름이나 나와의 관계가 저절로 정립된 것을 자각하게 된 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올 삼촌을 기다리며 나를 포함한 삼촌의 몇몇 조카들, 즉 내 사촌 동생들과 함께 삼촌의 저녁상을 차리고 있을 때였어. 그때 알았지. 나에겐 한 명의 삼촌과 여러 명의 사촌이 있다는 것,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이 지금 어디에 사는 건지 말이야. 왜 어린 우리가 시장을 봐서 삼촌 저녁상을 차리고 있는지도 알게 됐고 사랑스러운 조카들의 저녁상을 받고 기뻐할 삼촌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어. 앞뒤가 전부 제대로 연결이 된 첫 번째 기억이었던 거야. 그 전까지는 아주 드문드문, 한 이벤트만 단편적으로 기억할 뿐이었지. 네 살 때 수영장에서 고모가 내 머리채를 잡아채며 익살스럽게 사진을 찍었을 때나 아침에 라면을 먹어선 안 된다는 아버지가 라면을 먹고 출근하는 모습을 본 7살 때,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어서 단둘이 놀러 다녔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 수학시험을 못 봐서 성적표를 집에 가져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4학년 때 기억같이 말이야. 그 첫 번째 자각이 있고 나서 난 거의 매일의 일들을 머릿속에 저장하기 시작했어.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일기가 도움을 주고 있지. 하지만 그녀를 만난 그 순간부터 다시 기억이 끊기길 시작했어. 다시 단편적으로 기억이 저장되기 시작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지. 다시 어린애의 뇌 구조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했는데 얼마 전에 책에서 이런 문구를 봤어. “마음이 여리거나 상처받기 쉬운 스타일의 사람들, 많은 고통과 어려운 일들 혼란스러운 것들을 겪은 사람들은 그들의 뇌가 알아서 그 기억을 지워준다”고. 나 스스로 자정 능력이 생긴 거라고 믿게 됐지. 분명 내 첫사랑과 관련된 많은 부분에서 행복했고 다신 시도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대상이 잘못 정해진 사랑이란 결국엔 상처로 끝나는 거잖아…. 그리고 첫사랑이었고… 단편적인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말이야….”
“잠깐, 준이야.”
모두 진지하게 얘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진아가 끼어들었다.
“사람 이름을 말해야지. 그 선생님 이름이 뭐야? 이름은 아주 중요한 거라구.”
진아는 다시 한 번, 이름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쉽사리 부를 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름이 존재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존재 자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한 존재를 누군가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때로 이름은 필요하다.
“응…. 최명주 선생님이야. 최. 명. 주. 이름 예쁘지? 아무튼, 그렇게 내 눈에 들어온 젊은 여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였어. 처음엔 사랑이란 느낌보다 호기심이란 느낌이 더 강했던 거 같아. 난 센스가 없는 편이라 아름다움과 사랑을 연결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거든. 지금도 그건 그래. 첫 수업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 막혔던 기도가 뚫리는 듯 숨을 내쉴 수 있었어. 그다음 수업, 그다음 수업이 지나면서 영어 수업이 힘들어질 거란 걸 알게 됐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중학교를 올라갈 때만 해도 알파벳을 거의 모르고 있었거든. 대문자, 소문자도 구분하지 못했고 스펠링을 읽는 법조차 따라가기 힘들었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못한 것뿐이야.
반에서 항상 10등 안에 들었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교에서는 과목도 많고, 반 배치고사를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만 봤기 때문에 배치고사 성적으로 반장을 뽑을 당시 10명에도 끼지 못했지. 충격이었어.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심지어 공부를 못할 것 같이 보이던 애들도 알파벳은 다 알고 바로바로 읽고 쓸 줄 아는 거야. 당연히 영어 선생님은 모든 학생이 기본적으로 알 거라 생각하고 알파벳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호기심을 품게 된 선생님이 내가 제일 싫어할 수밖에 없는 과목 담당이라니!
중학교를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나서 전체 모의고사를 봤는데 역시 영어 때문에 성적이 말이 아니었어. 게다가 수학까지도 왜 이렇게 어려운건지, 가장 중요한 두 과목이 압박하는데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가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모의고사 결과가 나오고, 다른 반과 달리 우리 반에서 영어 만점자들이 몇몇 나오자 선생님은 우리 반을 특별히 칭찬했고 네다섯 명 되는 만점자들에게 공책 몇 권을 선물해줬어. 그 녀석들은 이미 과외를 받으면서 3학년 문제를 풀고 있는, 치맛바람 거센 어머니 밑에서 부유하게 자란 녀석들이었거든. 그런 녀석이 한 둘이 아니라니!
선생님은 반 아이들 성적을 말하면서 친절하게도 한 명, 한 명에게 상담했는데 번호가 끝에서 세 번째였던 나는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 점수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 난 반에서 서기를 맡고 있었는데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면 어쩌나, 선생님이 날 보고 실망했다고 말하진 않을까 하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 긴장 때문에 한 번 열린 땀구멍은 쉽사리 다시 닫히지 않아 초봄인데도 땀을 비 오듯이 흘렸지. 그렇게 처음으로 선생님과 말을 나누게 된 거야. 한 달 만에.
“53번, 준이. 앞으로 나와 볼래? 준이는 2반 서기지? 교무실에서 가끔 봤는데. 흐음…. 성적은 그렇게 나쁘지 않구나. 앞으로 열심히 해.”
선생이란 존재가 그렇게 아름답게 웃는 건 처음 봤어. ‘이 사람은 역시 선생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지. 정말, 천사 같았어.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자, 여기 성적표. 안 받고 뭐 하니? 호호”라고 말하며 웃는 모습으로 선생님은 성적표를 건네줬어. 정신을 차리고 선생님에게 넙죽 인사를 한 후 자리에 돌아와 성적표를 봤어. 점수는 70점도 안 된 거로 기억해. 맨 아래엔 선생님이 쓴 듯 글이 적혀 있었어.

「준이는 다른 과목은 성적이 괜찮은데 영어 점수가 좀 낮구나. 영어 수업이 싫은 거니? 힘내서 열심히 하자!」

웃는 모습, 남겨진 메모, 처음 나눈 말들, 성적을 탓하지 않는 것까지…. 선생님을 향한 관심은 차츰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아. 그날 결심했지. 선생님에게 다가갈 방법은 성적을 올리는 것뿐이라고. 그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공부에만 전념했어. 초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지만 중학생이 되어선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지. 같은 반 친구 중 절반 이상이 학원이다 과외다 하면서 공부하는 걸 알았거든.
아버지에게 중학생이 돼 혼자 공부하자니 많이 힘들지만, 성적을 올릴 테니 문제집을 많이 사달라고 해서 20권가량 되는 참고서, 자습서들을 한꺼번에 샀어. 내가 일요일에도 학교에 갔다면 믿겠어?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30분 이상 가야 하는 길인데도 지치지 않고 공부에 몰입하며 매일 학교에 나갔어. 내가 소속된 교실, 내가 앉는 자리에 앉아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 잠은 6시간 정도 잤고 쉬는 시간에도 공부만 했고. 무언가에 그렇게 몰두해 보긴 처음이었어. 목표가 생긴 거지. 중간고사를 보는 일주일 동안은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질 않았다구. 어머니한테 부탁해서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났었거든.
중간고사가 끝나고 스승의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담임이 체육실로 부르더라고. 담임은 체육 담당이고 젊고 잘생겨서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좋았지. 담임은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묻는 거야. 혹시 눈치챈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그랬더니 담임이 “이번 중간고사에서 네가 우리 반 일등이다, 반에서 10등 안에도 들지 못했는데 이번엔 전교 10등 안에 들었다”라고 말하는 거야. 뛸 뜻이 기뻤지. 솔직히 기대는 안 했지만 이렇게까지 좋아질 줄 몰랐거든.
성적표를 받자마자 영어 점수부터 확인했는데 당연히 100점이었어. 실은 나, 영어책을 전부 외웠거든. 교실로 올라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친한 애들은 축하했지만, 몇몇은 경계하더라고. 그런데 그날 영어 수업이 없었어. 허탈했지. 수업이 끝나고 학급 일지와 출석부를 두기 위해 교무실로 가는데 선생님이 종례를 마치고 나온 듯 저 앞을 걸어가고 있었어. 달려가서 “선생님, 저 일등 했어요! 일등이라구요!” 라고 말하면서 축하받고 싶었는데 어떻게 했을 거 같아? 그냥 선생님 뒤만 졸졸 따라갔어. 따로따로 교무실로 들어가서 선생님은 자리로 갔고 나는 학급일지를 학년 주임 선생님께 체크 받고 출석부는 자리에 꽂아둔 채 나왔지. 주임 선생님은 나를 칭찬했어.
“준이, 이번에 성적 많이 올랐다며? 착실한 줄로만 알았는데 인제 보니 공부도 잘하네. 축하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라고….
성적표를 손에 쥐고 가방을 메고 운동장으로 나왔는데 집에 가기가 싫었어. 이대로 가버리면 다신 이 기분을 느끼지 못할 거 같았어. 그렇다고 교무실로 다시 뛰어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때 선배로 보이는 형이 옆에서 신발 끈을 묶고 있었는데 표정이 안 좋았어. 신발 끈을 나비 모양 매듭으로 묶는 데 계속 실패해서 짜증을 내더라구.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꼭 낙오자의 표본 같았어. 신발 끈을 묶는 것마저 잊어버린 사람은 저런 자세로 평생 살아가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 신발은 나이키 제품의 농구화였어. 그 당시 나이키 농구화가 최고 인기였거든. ‘잘 사는 집안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 신발 끈 끝부분은 쉽게 풀릴 것 같은 매끄러운 재질의 플라스틱으로 코팅 처리가 돼서 그 부분에서 자꾸 걸려 나비 모양을 못 만들더라구. 계속 보고 있다가 결국엔 내가 다가가서 신발 끈을 묶어줬지. 선배는 멍하니 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고맙다고 하더라구. “뭘요”라고 대답하고 가려는데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이기에 흥미가 있어서 물었어.
“표정이 왜 그래요? 신발 끈 때문이에요?”
“오늘 성적이 나왔거든. 집에 가면 혼날 거 뻔해서 걱정돼서 그래.”
“몇 등인데요?”
“7등. 전보다 3등이나 떨어졌어.”
“에이, 우리 선 그 정도면 잔치를 할 걸요.”
“네 손에 쥐고 있는 성적표. 그거 니 꺼지? 봐도 될까?”
“네? 네….”
선배는 내 성적표를 보더니 잠시 표정이 일그러졌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거로 생각한 모양이야. 난 서둘러 진화에 나섰어.
“이번엔 운이 좋았어요. 지난번에는 10등에도 들지 못했는데.”
“정말이야? 굉장하구나. 아무튼 축하해.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시겠다. 난 이만 가볼게.”
선배는 가 버렸어. 이제 겨우 중3이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더라. 난 중간고사만 잘 본 것만으로 다행인데. 그 선배 때문에 생각이 좀 복잡해졌지. 혼자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이것저것 생각했어.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내린 결론은 ‘성적을 올렸으면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였어.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고, 유난히 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발을 떼는데 누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탁 잡는 거야. 깜짝 놀라서 뒤를 바라봤는데 더 놀랄 수밖에 없었어.”
“선생님이었구나! 맞지?” 진아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응. 우연이라는 것도 어떤 가능성이 있을 때만 발생해.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말하는 우연이란 것은 없어.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이 우연적으로 이뤄질 확률은 나란 가능성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 그때 내게 우연을 가능케 해 준 가능성은 하늘에 있었어. 그때의 하늘을 기억해. 초여름 어느 날, 수업이 끝난 후의 늦은 오후였어. 서울의 중심지로 향해 트인 공항로와 주변 논밭들과 맞은편에 위치한 공항의 하늘은 꽤 넓었어.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하늘이었지. 그런데 그 하늘이 어땠는지 알아? 온통 붉은 핏빛이었어. 하늘에서 누군가 칼에라도 찔린 듯 흐트러진 피들이 파란 하늘을 뒤덮는 것 같았지. 한 명만 찔린 게 아니야. 아마도 수십 명은 될 듯 해. 내 눈으로 확인한 색들이 그랬으니까. 아주 연한 색부터 짙은 자주빛까지 전부 다른 색의 피들로 범벅된 하늘, 그 하늘이 내게 우연을 열어 줬어. 비행기들이 그사이를 뚫고 날아가듯이 그 순간 한 인연이 나를 덮치기 시작했어. 평생 잊지 못하고 그 안에서 얽매여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머금은 채 말이야….
그래, 그 순간 선생님이 내 뒤에 서 있었어. 당황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지. 선생님은 막 뛰어온 듯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는 “길 건너야지. 빨리 뛰자”라고 말하곤 다시 뛰기 시작했어. 우리가 건넌 길은 공항로 초입에 있는 8차선 도로였는데 항상 건널 때마다 신호가 짧아 반을 지나선 항상 뛰어야만 했었지. 빨간 신호로 바뀌고서도 길을 다 못 건넌 나와 선생님 때문에 차들은 그새를 못 참고 경적을 울려댔고,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며 마저 길을 건넌 선생님은 숨이 찬 듯 보였어. 난 옆에 서서 멀뚱멀뚱 딴 곳을 바라봤고.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된다는 듯 선생님은 천천히 걷길 시작했지. 나도 따라 걸었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그 3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얼마나 떨렸는지 모를 거야.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말을 걸었어.”

“준이, 이번에 성적 많이 올랐더라? 어떻게 된 거니?”
모든 선생님이 모든 학생의 성적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정상일까? 순간 나는 당황했다.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질문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어떤 표현으로라도 고백할 것이 두려웠다. 내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드러나 선생님이 내 마음을 읽을 것이 두려웠다. 선생님과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떨구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아니, 아, 네. 그냥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래? 대단하네. 아, 저기 버스 온다. 선생님은 먼저 갈게.”
단 한 번의 질문, 그리고 대답. 700번 좌석버스가 나를 향한 선생님의 관심을 앗아가 버린 것일까. 선생님은 버스를 타면서 나를 한 번 보고는 그대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버스는 출발했고 나는 선생님이 탄 버스 경유지를 살펴봤다. 김포공항, 영등포 그리고 여의도로 가는 700번 좌석버스. 10분이 지나자 같은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500원의 거금을 내고 무작정 그 버스를 타버렸다.
뒤쪽 좌석에 앉아서 아마도 이 자리에 선생님이 앉았을 거로 생각하면서, 여의도까지 왕복으로 오고 가는 3시간 내내 선생님이 한 말만 떠올렸다. 선생님이 한 말과 모습을 매치시키며 내 안에서 온전히 기억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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