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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3) |
장길수가 손영무를 데리고 간 곳은 경마장이었다. 경마장까지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손영무는 어디를 가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았고 장길수도 어디를 간다는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난 후여서 조금은 한산해진 전철 구석자리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느라고 난간에 걸친 팔에 턱을 괴고 뒷머리를 기댄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전철에 오르기 전에 샀던 스포츠신문을 뒤적이고 있는 장길수를 흘낏 보고는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이내 잠이 들었던지 장길수가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경마장역이라는 것을 알았다. 출근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경마장역은 전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붐비기 시작했고 더러는 앞 다투어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손영무는 이리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장길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힘들게 경마장역을 빠져나왔다. 난장같이 부산스럽고 시끌벅적한 경마장역입구를 지나치자 경마장역에서 뿐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바쁜 걸음들로 긴 행렬을 이루며 한곳으로 몰려가고 있었고 각양각종의 자동차들이 두 줄 세 줄로 길게 늘어서서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형 경마장 처음이지?"
장길수가 담배를 피워 물며 물었다. 손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마가 뭔지는 알아?"
장길수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손영무는 대답대신 눈을 껌벅여보였다. 간혹 신문이나 방송에서 부정경마에 연루된 사람들이 구속되었다거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경마로 잃은 돈 때문이었다거나 하는 보도를 보거나 들은 적은 있었지만, 경마장이라는 것이 그저 좀 규모가 큰 도박장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손영무로써는 자신과는 무관한 세계의 이야기라고 그냥 흘려버렸던 터였다.
"원수가 있으면 경마장에 데리고 가라는 말이 있어. 굳이 원수를 갚으려 애를 쓰지 않더라도 경마로 저 스스로 패가망신하게 될게 뻔하기 때문이라는 거지. 또 경마장에 데리고 가는 놈이 있으면 그놈이 내 인생의 원수가 된다는 말도 있고. 경마장에 데리고 간 놈 때문에 경마를 배우게 되서 경마로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는 거지. 어떤 경우든 이제 나하고 손형 사이가 원수사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며 장길수가 씩 웃어보였다. 손영무는 장길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길수는 작은 컨테이너박스 같은 매장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쳐 한곳으로 가더니 안에 있는 남자에게 천원짜리 두장을 내밀었다. 남자는 장길수를 잘 알고 있는 듯
"오랜만이요?"
하며 인사를 건네고는 운전면허시험예상문제지 같은 책 한권과 싸인펜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오늘은 재미 좀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월말경주니까 배당이 좀 나오겠죠?"
"하나 잘 건져야 하는데 말예요?"
"지난번에는 책에서 한방 잡아 준거 잘 찍었잖아요?"
"그때 같은 경주가 오늘 또 있겠어요?"
"첫 경주도 2.8 부러뜨리고 34배로 들어왔다는데?"
"그래요? 그럼 오늘은 배당 좀 있겠네?"
장길수와 남자는 서로 묻는 건지 대답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대화를 나눴고 손영무는 뒤에서 멀거니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분주히 돈을 내밀고 책을 받아 들고 있었다. 장길수는 물고 있던 담배를 길 한가운데 놓여있는 고무물통 안으로 집어 던지고는 받아든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시 앞서 걸었다. 손영무는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장길수의 뒤를 따랐다.
"둘이요!"
장길수는 입장권매표창구로 다시 천원짜리 두장을 내밀고 입장권 두장과 거스름돈을 받아 쥐고는 들어가자는 눈짓을 해보였다. 경마장은 손영무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커보였고 사람들도 많아보였다. 장길수는 두리번거리는 손영무를 끌다싶이하여 사람들이 삥 둘러 모여 있는 한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층층이 길게 늘어선 플라스틱의자 한곳에 앉혔다.
"자! 저놈들이 오늘 두 번째 경주에 뛸 말들이야. 손형 한번 골라봐."
조그만 트랙 안에서 묘한 옷차림을 한 채 무표정하게 말고삐를 쥔 사람들을 따라 꺼덕거리는 걸음으로 트랙을 돌고 있는 말들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장길수가 말했다.
"내가 뭘 알아야지."
손영무가 영문도 모른 채 장길수를 따라나선 후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경마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게임인지조차도 모르는 손영무의 눈에는 트랙을 돌고 있는 말들이 그저 크기와 털빛만 조금씩 다를 뿐 생김새가 똑같아 그 말이 그 말 같아보였다. 말안장 아래 쓰여 있는 제각기 다른 번호만이 말들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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