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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2화 "유혹" (4) |
"경마는, 처음 하는 사람은 무조건 이기게 돼있어."
장길수는 한번 말들을 흘낏 바라보고는 다시 펼쳐놓은 책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훑어가며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싸인펜으로 알아볼 수 없는 표시들을 해나갔다.
"저 말들이 뛰는 거야? 여기서?"
"이렇게 작은데서 어떻게 뛰어? 여기 말고 이 건물 뒤로 경주로가 따로 있어. 여기는 예시장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저 말들이 경주직전에 사람들한테 미리 선을 보이는 곳이야. 사람들은 여기서 저놈들이 오늘 잘 뛸 놈인지 어떤지 컨디션을 살펴보는 거고."
손영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괜스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층층이 놓여있는 플라스틱의자에서뿐 아니라 계단과 그 뒤편으로도 사람들이 삥 둘러선 채 트랙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웅장하게 솟아있는 건물의 각층 이곳저곳에서도 사람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백설공주라는 영화에 등장했던 배우들처럼 아주 키가 작은 사람들이 역시 묘한 옷차림과 색이 다른 모자를 쓰고 줄을 지어 나오더니 트랙 한가운데로 일렬로 늘어서서 누군가의 신호에 따라 사람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내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서부영화의 카우보이들처럼 단숨에 말 등 위로 뛰어오르지도 못하고 조금 전 말고삐를 쥐고 말들을 끌고 다니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 둘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이번엔 키 작은 사람들이 말에 오른 채 아까처럼 다시 트랙을 꺼덕꺼덕 도는데, 아까와는 달리 삥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뒤편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말위에 앉아있는 키 작은 사람들도, 처음 말고삐를 쥐고 말들을 끌고 돌던 사람들처럼 고개를 푹 숙이거나 무표정하게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린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바퀴를 돈 후, 말안장 밑의 번호순서대로 지하도입구 같은 곳으로 하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그 작은 트랙을 내려다보며 삥 둘러 앉아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건물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자! 가서 배당 좀 보자고!"
하며 장길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뛰는 거 봐야지?"
장길수가 다시 재촉을 하자 손영무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한영길을 뒤따랐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사람들 머리위로 모니터들이 걸려있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모니터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앞서가던 장길수가 벽 한곳에 붙어있는 투명플라스틱상자에서 노란색 종이 두장을 빼냈다. 복도를 가로지르자 온통 유리로 된 벽면이 나타났고 먼 곳을 바라보고 서있는 사람들의 뒷모습들이 보였다. 장길수를 따라 유리벽 한곳의 열린 문을 나서던 손영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손영무의 시야로 보인 경마장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렇게 크고 넓은 경기장이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손영무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흘낏 손영무를 바라보던 장길수가 어깨로 툭 밀쳤다.
"어때? 대단하지? 나도 처음 왔을 때 놀랬다니까?"
"저게 트랙이야?"
"그래."
"말들이 저길 한바퀴 돈단 말이지?"
"다 그런 건 아냐. 매 경주마다 거리가 달라서 한 3분의 1정도를 돌기도하고 반정도를 돌기도하고 한바퀴 조금 더 돌기도하고 그래."
손영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경쾌한 음악이 들려오더니 조금 전 건물 뒤편의 조그만 트랙을 돌던 말들이 다시 모습들을 보였다. 경기장에 설치된 대형화면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크게 보이고 말과 말에 탄 사람을 소개하는 듯한 자막들이 보였다 사라지곤 했다. 대형화면 옆에는 숫자만 가득한 대형전광판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물결처럼 깜박거리며 숫자를 바꾸는 것이 증권거래소의 주식시세표 같았다. 장길수는 지갑에서 만원짜리 다섯장을 꺼내더니
"여기 잠깐 있어. 마권 사올 테니."
하며 노란색 종이에 사인펜으로 표시를 해나갔다.
"저 앞으로 나가서보면 안돼? 다른 사람들도 나가있는데?"
손영무가 계단마다 빽빽이 자리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 너머 계단 앞쪽 바닥에 돗자리와 신문들을 깔아놓고 무리를 지어 앉아있는 사람들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마권부터 사고..."
하고 장길수는 다시 유리문을 나가서 복도 벽 한쪽의 창구들 앞으로 줄을 서있는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손영무는 잠시 경주로와 대형화면과 물결처럼 숫자를 다시 표시해내는 대형전광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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