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날 오후 마교수의 강의시간이었다.
"다음!"
조교가 다음 순서를 불렀다. 지숙이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조교가 스틱을 치며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지숙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교는 물론 다른 학생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숙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을 가만히 서있던 지숙이 천천히 카세트플레이어 쪽으로 가더니 테이프 하나를 집어넣고 스타트버튼을 눌렀다. 레게뮤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숙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교는 당황했고 한곳에서 거만스레 앉아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교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숙이 음악에 맞춰 온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하자 여학생하나가 뛰어나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내 다른 학생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합세를 했다. 조교와 나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마교수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신음을 뱉어냈다. 지숙과 학생들은, 마교수와 조교의 반응에는 아랑곳 않고 카세트플레이어의 볼륨을 높이고는 더욱 광적으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지숙은 무용연습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유학 못 갈까봐 걱정되니?"
마교수를 만났던 뷔페레스토랑이 있던 호텔의 회전문을 종원에게 끌려나오듯 하며 밀치고 나섰을 때
"왜 모든 게 네 멋 대로니? 아무런 소식도 없이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불쑥 나타나서는 또 아무런 얘기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불쑥 나타나구? 그리고 네가 뭔데 여기까지 나타나서 이러는 거야? 왜 날 귀찮게 하니? 모든 게 왜 그렇게 네 멋 대로냐구? 내말 듣고 있는 거야?"
하고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종원의 팔을 뿌리치며 지숙이 소리치자 종원은 그런 지숙의 얼굴에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유학 못 갈까봐 걱정되니?" 
했었다. 지숙이 다시 
"그래!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아니? 4년을 기다려온 기회야."
하고 소리를 지르자 종원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럼 더 기다리면 되잖아? 4년도 기다렸다며? 그리고 그따위 음흉한 자식 도움 받아서 유학 가서 뭐해? 네 힘으로 가! 또 유학 안가면 어때?"
했었다.
학교를 뛰쳐나온 지숙은 갑자기 종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숙이 종원을 찾아 낼 방법은 없었다. 지숙은 종원이 뭘 하고 있는 지 어디에서 사는지도 몰랐고 심지어 핸드폰번호까지도 몰랐다. 착신번호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공중전화나 상점의 전화나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핸드폰을 빌려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어떤 땐 아무 연락도 없이 그냥 불쑥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제멋대로 사라졌다.
지숙은 이제, 종원의 말처럼 마교수같은 인간과 부끄러운 거래를 하면서까지 유학을 가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그의 말대로 유학을 안가면 또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숙은 스스로 무용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거나 무용가로서 대성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럼에도 무용유학을 가려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리고 싶은 도피심리에 기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것일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아버지에게로 부터일지 아니면 오만하고 허영심 가득한 어머니에게로 부터인지 어쩌면 삶의 목표도 없고 아무런 꿈도 없는 자신에게로 부터의 도피심리인지 몰랐다. 어쨌든 매일 마다 반복되는 지루하고도 아무 의미도 없는 생활로부터의 이탈을 할 명분과 방법이 생겼다는 것은 그녀가 모처럼 갖게 된 흥미로운 관심사였고 달콤한 유혹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알고 있을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든지 또 어떻게 살아가든지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에서 한껏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유학을 떠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마교수의 도움으로 뉴욕대학으로의 유학과 컨텐포러리무용단의 입단을 핑계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구속으로부터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그런데 종원이 어떻게 알았는지 호텔의 뷔페레스토랑에 불쑥 나타나 마교수와의 은밀한 거래를 깨트려버렸다. 마교수와의 은밀한 거래란, 마교수가 원하는 뻔한 것일 것이었다. 눈 딱 감고 한번만 어쩌면 한번쯤 더 그와 동침을 해주면 뉴욕대학으로의 유학과 컨텐포러리무용단의 입단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밀약이었을 것이었다. 까짓 한두 번의 동침이야 그의 입 냄새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그리고 그의 음흉한 눈빛과 능글맞은 미소와 역겨운 목소리가 아무리 소름끼치더라도 정말 한두 번만은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두 번만의 동침으로 온갖 구속으로부터의 도피와 무한한 자유를 얻어낼 수 있다면 한두 번의 동침이 아니라 그보다 좀 더 심한 경우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교수의 은밀하고 달콤한 유혹과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종원의 출현과 방해로 그 계획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