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계획이 종원에 의해 깨어졌다하더라도 마교수는 자신에게 한 번쯤은 다시 기회를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음흉한 눈빛과 능글맞은 미소와 역겨운 목소리를 가진 마교수는 단 하루를 참아내지 못하고 가까웠던 친구 나영에게 그 은밀하고 달콤한 유혹과 거래를 다시 제시해보였고 나영은 그 유혹과 거래가 자신에게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흔쾌히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지숙으로서는 마교수나 나영이 모두 역겨웠다. 그 역겨움을 마교수의 강의시간 때 마교수가 안무하고 표현하게 한 율동이 아닌 레게음악에 맞춰 요염하고 퇴폐적인 흐느적거림을 춤추어 보임으로써 표출해보인 것이었다. 수업시간 중에 교수의 지도를 거부하고 돌출된 행동을 보인 후 강의실과 학교를 뛰쳐나옴으로써 지숙은 뉴욕대학으로의 유학과 컨텐포로리무용단입단의 꿈을 버렸다. 어쩌면 학교를 그만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종원때문이었다. 비록 자신의 취향과 재능과 꿈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부터 그리고 매일 마다 반복되는 지루하고도 아무 의미 없는 생활로부터 도피를 할 수 있는 명분과 방법과 기회를 종원이 날려버렸다.
"나쁜 자식!"
교문을 나서며 지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그 나쁜 자식이 종원인지 마교수인지 스스로 햇갈렸다. 지숙은 택시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든지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아니 떠나진 못해도 꽉막혀있는 듯한 이 도시만큼은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자식!"
다시 한 번 지숙의 입에서 나쁜 자식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나쁜 자식이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그 나쁜 자식은 종원이었다. 지숙은 갑자기 종원이 보고 싶어졌다. 종원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아마도 처음일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한두 번쯤은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종원이 보고 싶어진 걸까? 종원 때문에 뉴욕대학도 컨텐포러리 무용단도 물거품이 되었는데...
"그래. 종원이라면 이 숨 막힐 듯한 도시에서 탈출을 시켜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 줄을 지어 정차되어 있는 택시행렬의 맨 앞쪽으로 걸어가서 막 차 뒷문을 열려는 순간 요란스레 크락숀을 울려대며 자동차 한 대가 택시 앞을 막아섰다. 지숙이 흘낏 고개를 들어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열린 차창 쪽으로 몸을 돌려 손을 흔들어대는 종원이 보였다. 순간 지숙은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지숙은 택시를 지나쳐 종원이 타고 온 차로 다가갔다.
"타!"
종원이 특유의 히죽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지숙이 차 곁에 빗대 서서 팔짱을 한 채 물었다.
"어서 타기나 해! 가면서 얘기해도 되잖아?"
종원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숙이 잠시 망설이더니 차문을 열었다. 차는 이내 굉음을 울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숙이 바란바 대로였다. 지숙의 대학캠퍼스는 서울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는데 차는 서울의 바깥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도시탈출! 어때 좋지?"
종원이 물었다. 지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혀 예상도 못했고 또 원하지도 않았던 나의 출현과 내가 벌인 해프닝 때문에 그 음흉한교수하고 잘못되었을 테고... 그래서 그 음흉한교수는 너 대신 다른 여학생을 선택하게 되었을 테고... 넌 그 음흉한교수의 수업시간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테고... 그래서 지금쯤은 이 숨 막히는 도시를 탈출해서 어디론가 무작정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테고... 그 순간 내가 나타난 거지. 안 그래?"
종원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저 혼자 지껄여대더니 흘낏 지숙을 보았다. 지숙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구? 내가 얘기했잖아? 난 항상 네 곁에 있다구."
종원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야.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날 기다렸다는 거야."
종원이 힘을 주어 말했다. 순간 지숙은 온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말이 맞지?"
하며 종원이 특유의 넉살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떻게 알았어?"
지숙이 물었다.
"말했잖아? 난 항상 네 곁에 있다고."
종원의 대답은 그뿐이었다. 지숙은 더 이상 종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았다. 질주하는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 지나쳐가는 가로수들의 짙은 초록빛들을 바라보는 순간 그 음울했던 기분들이 말끔히 씻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