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떻게 할 거요? 하와이, 싸이판, 마우이, 호주, 싱가폴... 그래 스위스! 알프스엔 안 갈 거요?"
종원의 질문에 규태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종원이 다시
"싸나이가 한번 태어났으면 해보고 싶은 거나 실컷 해 봐야지?"
하더니 다시 
"형! 가! 가면 될 거 아냐?"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종원은 여전히 체념 가득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고는
"네 꿈속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이건 현실이야..."
하더니
"난 이미 각오가 되어있다."
하고는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표정은 정말로 어떤 각오가 되어있는 듯한 냉정한 표정이었다. 종원이
"차라리 큰형님한테 용설 빌어. 큰 형님 대신에 삼년도 썩었었잖아?"
하는데 규태는 다시 체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종원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에이 씨팔!"
하고 자신에게 하는 건지 규태에게 하는 건지 모를 욕지거리를 해대며 나동그라져 있는 의자를 다시 발로 걷어찼다. 순간 규태가 허리춤 뒤쪽에서 권총을 꺼내 종원 앞에 불쑥 내밀었다. 종원의 눈이 휘동그래졌다.
"기억나니? 언젠가 너와 내가 털었던 벤츠 케비넷 안에 있었던 거다."
종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내겐 필요 없어진 거 같다. 이 총으로 박동식 그놈의 골통을 쏴버리고 싶지만...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으니..."
하고 다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체포되거나 백태삼 놈들에게 개죽음이라도 당하게 되면... 네가 박동식에게 복수해줄래?"
했다. 종원이 규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꼭 복수 해줘. 그리고... 네 형수... 영숙이... 잘 보살펴 줘."
하며 규태가 시선을 돌렸다. 종원은, 시선을 돌리는 규태의 눈동자가 반짝하는 것을 보았다. 규태는 시선을 돌린 채 종원에게 다시 총을 내밀었다. 종원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총을 받았다. 규태는 종원의 손을 꼭 쥐더니 어둠 저편의 먼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종원은 규태가 은신해있는 여인숙을 빠져나와 한참동안을 무작정 걸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처럼 ''에이 씨팔!''만 되풀이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문득 낮에 지숙의 방에서 들었던
"나 마교순데 유학문제 잘 될 것 같아... 맨트리호텔 뷔페에서 만나 자세한 얘길 나누도록 하지... 7시가 좋겠구만. 그럼 그때 보자구. 참! 난 섹시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좋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나온다면 더욱 좋구. 하하하..."
했던 전화 메시지 음성을 기억해냈다. 종원은 빠른 걸음으로 큰 거리로 나가 손을 흔들어 달려오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맨트리호텔의 뷔페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종원은 메스꺼운 목소리를 가진 중년사내와 함께 있을 지숙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테이지에서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건반을 두드리며 손님들의 식사 분위기를 돋아주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짝들을 이루고 식사를 하거나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있었고, 전망 좋은 한곳에 중년사내와 지숙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이만한 기회 다시 잡기 어려워져. 뉴욕대학에서 실기전공이 아닌 이론전공의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아주 드믈 거든? 하지만 지숙이의 입학 원서들에 대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다 취해 놓았고 폴 베이건 교수가 그쪽에서 힘써주겠다고 했으니까 믿고 있어도 될 거야."
하고는 중년사내가 지숙에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숙은
"감사합니다."
하고 애써 억지미소를 지어보였다. 중년사내는 다시
"참! 컨텐포러리무용단에서 활동 해보고 싶다고 했었지?"
하고 역겨운 저음으로 물었다.
"네."
지숙이 고개를 까딱 해보이며 대답했다. 중년사내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폴란드 출신의 라스코프냐 나비라티와 뉴욕의 라마마무용단에서 함께 공연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추천서를 보내주면 도움이 될 거야. 졸업 작품발표회 끝나는 대로 뉴욕에 함께 가자구. 유학뿐 아니라 컨텐포러리무용단 입단까지 적극적으로 뛰어다녀 줄 테니까. 어때? 좋지?"
하고는 다시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슬쩍 윙크를 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