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시간이 남기에
40대의 동영상 제작자 소위 영화감독은 왕녀의 여배우 장화자에게 전화를 해서 오후 여섯시 반에 블루로얄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했고, 장화자로부터 7시에 만나자는 답변을 받아냈다. 이미 전에 야밤에 한 번 만났을 때 감독에게서 알 수 없는 여유와 수상한 돈냄새를 맡은 바 있는 장화자는 감독을 재차 만나는 것이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사실 감독이라는 이 작자는 원래 돈이 없고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그렇지 성품이 위험하거나 사기성이 있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는 불상해서 거둬주고 싶은 마음까지 일어날 정도였으나 오랜만에 본 그는 달라져도 한참은 달라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돈이 좀 생긴 거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감독은 그런 게 티가 좀 나는 인물로 장화자 같은 세상 물을 꽤나 먹은 여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벗어날 순 없었던 것이다. 암튼 오늘 이 작자를 만날 땐 전보다 좀 더 꾸미고 나가서 아예 전신을 옭아매야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미모와 뇌쇄적이라고 듣는 육체에 뭘 좀 바르고 매달고 휘감으면 무궁화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에서도 단연 돋보이기 마련일 터였다. 그렇다고 접대부처럼 난하게 보이자는 건 아니고 매우 하이클래스에 거하고 있거나 문화 쪽을 선도하는 여성으로 정도로 비치면 될 것이었다.
한편 감독은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을 한 잔 앞에 놓고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7시면 아직 시간이 세 시간 정도 남았는데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지나치게 뛰기에 다른 뭔가 시간을 때울 것이 필요했다. 이상하게도 복권 탄 돈이 생기고부터 그 좋아하던 아니 직업상으로라도 자주 봐주었던 영화가 한 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한가하게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노닥거리는 것 외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문득 감독은 경마장이나 가 볼까 생각하다 평일 낮인 걸 깨닫고 여기서 가까운 경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라면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거나 보며 두어 시간 심심찮게 보낼 수 있을 거고 거기서 나와서는 택시를 집어타고 이십여분 달리면 블루로얄 호텔이 나올 터였다.
감독은 누가 출전하는지 보지도 않고 그냥 내키는 대로 복승식에 10만원을 걸었다. 선글라스가 없는 걸 아쉬워하며 경륜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자신이 영화주인공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 곳이나 걸었다고 하지만 감독은 은근히 대박 욕심을 품고 있었다. 옆에는 웬 애송이 남녀가 데이트를 하는지 소리를 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젊음이 그들에게로 있었으므로 감독은 순간적으로 질투심이 일어났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