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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고 시간 있고
영화감독 김은 왕년의 여배우 장화자와 함께 달 밝은 밤 블루로얄 호텔 뒷길을 따라 산보를 하며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토록 화려하고 몸매가 뇌쇄적인 여자와의 동행은 그 외양을 감탄하면서도 주눅 들기 마련인데, 장화자가 오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마음을 열고 다소 유혹적인 몸짓을 해옴에 따라 어떤 기대감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달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등 별이 우리 주위를 맴돈다는 등 그런 감상적인 말도 닭살 돋기는커녕 진짜로 그러한 느낌으로 다가온 것도 서로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감독은 주머니에 복권 탄 돈이 들어 있어 서로의 외양이 괴리가 크다 하더라도 아주 위축되지는 않고 있었다.
주머니에 돈이 많으면, 주머니뿐 아니라 통장에 돈이 잔뜩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걸 과거에 수도 없이 생각해 봤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그러한 생활이 한 달 이상 지속되다 보니 나는 원래 이렇게 돈이 있는 인간이며 그 돈을 쓰도록 타고난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돈을 제대로 써 본 경험이 없는 자는 여전히 과거의 생활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마련이어서, 벤츠를 뽑는다든가 특급호텔에 장기투숙 한다든가 해외여행으로 3천만 원을 뿌린다든가 이러한 일은 엄두가 나지 않고 그저 과거에 하던 것보다 조금만 더 레벨을 높여 그것도 매번 비싸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돈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팽이 같았지만 비싼 일식점보단 해장국집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이 편하고 호텔보다 모텔 옆을 지나칠 때 마음이 더 밝아오는 것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호텔 앞에서는 육체적인 반응도 온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모텔 곁이라야 오히려 뭔가 야릇한 상상 또는 반응이 오니 아직은 과거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자 돈 쓰게 하는 일이라면 이골이 난 듯한 여자 장화자를 만났으니 다소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나 의외로 그녀는 기껏 보쌈 한 접시에 행복한 미소를 지어 감독을 감동케 하였고 이 여자를 위해서 돈을 지속적으로 좀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골목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장화자가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 이런 뜻을 밝힌 것으로, 그 시간의 주도권을 감독에게 넘긴 것인데 이 시점에서 감독은 현명한 판단을 하여야 했다. 다짜고짜 ‘나란히 좀 누워보자’ 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좀 더 앉아 있는 방향으로 생각을 해봐야 했다. 일단 방향을 그렇게 잡고 앉아 있을 장소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