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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이 시험일입니다. 오늘은 수험장을 방문해서 시험 볼 곳을 잘 익혀 두고, 저녁 맛있게 먹고 푹 쉬세요. 선생님들도 내일 아침 수험장으로 응원을 나갈 테니 걱정하거나 긴장하지 말고 컨디션을 잘 유지하길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 정말 수고 많았어요. 열심히 준비한 만큼 다들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자, 그럼 내일 시험 잘 보세요.”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일이다. 임시소집 때문에 오늘은 수업이 없다. 간단한 종례와 함께 응시표를 나눠 받았다. 고사장을 다녀오기만 하면 된다. 나는 윤정 누나와 용욱이와 함께 종암동에 있는 한 중학교를 찾아갔다.
“휴, 벌써 시험이라니. 공부도 제대로 못 했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용욱이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꼭 합격했으면 좋겠다.”
“누나랑 용욱이 열심히 했잖아. 좋은 결과가 있겠지.”
“그래, 물론 너도 그렇고….”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고사장에 도착했다. 꽤 오래된 듯 매우 낡은 외형의 학교였다. 주변엔 상가가 밀집했고 학교 바로 앞에는 6차선 도로가 있다. 시끄럽고 산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시험은 보나 마나 합격하겠지만 어떤 성적으로 합격하느냐가 문제였다.
“주위가 너무 시끄러워.”
“뭐, 시험이야 학교 안에서 보는 건데 무슨 상관있겠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누나가 말했다.
“난 분위기나 공기 흐름에 민감해서 집중할 수 없을 거 같아.”
“아무튼 준이도 참 특이해.”
“맞아, 자기가 무슨 무당도 아니고 말이야. 하하.”
우리는 학교로 들어갔다. 다시 중학교에 입학하는 기분이 들었다. 교문을 지나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에 들어서자 그 기분은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시험 볼 교실을 둘러보고는 바로 학교를 나섰다.
“아직 진아랑 잘 지내? 걔 끝까지 애를 낳겠대?”
용욱이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고 누나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멘토 역할을 했던 누나에게 나는 모든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했었다.
“어쩔 수 없어. 막무가내야. 벌써 7개월 짼 데…. 배는 많이 불렀고 일은 안 나간 지 꽤 오래됐어.”
“밥은 잘 해 먹고 살아? 수중에 돈은 있고? 진아를 위해서 태교나 영양 섭취는 잘해주고 있는 거야?”
“열심히 챙기고는 있는데 그래도 부족할 거야. 돈은 그다지 부족하진 않고….”
사실 더는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매일 지출만이 있을 뿐이었다. 통장 잔액도 기십 만원 밖에 안 남았다.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누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괜히 참견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게 두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 같아.”
“진아도 가끔 묻곤 했었어. 부모님은 어떠신지, 형제는 어떻게 되는지, 집은 어디인지…. 그런데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화내고 다신 그런 거 물어보지 말라고 그랬었어. 나도 그냥 고아라고 생각하라고….”
“그러면 안 돼. 상처 주지 말아야지. 너도 힘들겠지만 진아도 많이 힘들 거야.”
누나는 같은 여자 입장에서 진아를 만나보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동감의 감각 구조가 부러웠다.
알탕에 소주 두 병을 반주 삼아 마셨다. 누나가 계산하고 서로의 운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오늘따라 취기가 조금 돌았다. 진아에게 줄 사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어릴 적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간식거리를 사 오는 모습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먹을 것으로 환원해 희롱하는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잘 다녀왔어?”
커다랗게 부푼 배가 낯설다. 나는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도무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산부인과에 같이 가서 검진을 받자는 진아의 부탁을 수없이 거절했었다. 초음파를 통해 모니터에서 꿈틀거리는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진아의 배를 걷어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응, 자 여기 사과.”
“내가 좋아하는 청사과네. 그나저나 술 마셨어? 술 냄새나. 누구랑 마셨어?”
“점심때 한 병만 먹었어. 같이 학교 갔던 사람들하고.” 나는 전부를 드러내놓지는 않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그렇구나, 시험 보는 곳은 멀어?”
“한 시간쯤 걸려. 나 공부하러 학원에 다시 다녀올게.”
남은 공부를 하겠다고, 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학원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실은, 아이를 낳겠다고 한 뒤부터 나는 진아를 가급적 멀리했다. 그걸 의식했는지 진아는 더욱 적극적이어서 집에 있는 내내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을 만들고, 정말 수준급의 가정주부로 변모해 갔다. 그럴수록 더욱 낯설었고 거부감만 들 뿐이었다. 진아는 청량리 한복판에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황폐해지는 길을 걸으려 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죽기보다 싫은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누구나 죽기만큼 싫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못생긴 여자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죽기만큼 싫어서 미팅 장소에 가지 않는 남자나 아버지가 설교하는 교회가 죽기만큼 싫어서 무신론자가 된 자녀처럼. 나는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죽기만큼 싫었었다. 죽음을 선택하자니 학교에 가는 것이 애처로웠을 뿐,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학교에 가지 않은 것뿐. 그뿐이다. 신경은 예민해져서 얼굴 근육은 실룩거렸고 말수도 적어졌다. 비판 의식은 더 강해졌고 공격적 성향을 새로이 갖게 됐다. 진아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원인은 진아에게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이리라. 결국 잘못은 내게 있었다. 그것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내일 시험인데 집에서 쉬지.”
“집에 있으면 잠만 자잖아. 일찍 잠들었다가 밤중에 깨면 컨디션이 엉망일 거라고.”
“그래… 그럼 저녁이라도 먹고 가. 배고플 텐데….”
“밥 먹은 지 얼마 안 돼. 있다가 와서 먹을게.”
“그럼 일찍 와.”
집을 나서서 10분 정도 걷자 학원 앞에 도착했다. 물론 내일 시험을 앞두고 공부할 기분도 아니었다. 진아 말대로 집에서 쉬는 게 좋았을 텐데 왜 다시 집을 나왔을까. 진아가 미운 것도,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다. 단지 이상한 액세서리 하나 달고 다니는 진아가 낯설었다. 나보다 그것을 더욱 애지중지하는 진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사랑하기에 이해하고 원하는 대로 하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누군가 있을까 싶어 자습실에 가 봤다. 학생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희가 있었다. 조용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세희 옆에 앉았다. 역사 과목 썸머리 책을 보고 있던 세희는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가자고 손짓했다.
“웬일이야?”
강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희는 놀란 눈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눈 안에는 누구나 알아챌 만 한 반가움도 서려 있었다.
“세희야말로 웬일이야. 내일 시험인데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내일이 시험이니까 공부하는 거지.” 세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세희는 한 달 전부터 일을 잠시 쉬고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학원에 남아 수업을 듣고 보충 수업을 듣고 특강을 듣고 게다가 자율 학습까지. 처음에는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질문을 해서 나를 당황하게 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금세 나를 놀라게 하는 질문을 해서 또 한 번 당황하게도 했다.
“오늘 고사장은 잘 다녀왔어?”
“응. 언니랑 용욱이랑 같은 학교라며? 정말 부럽다.”
세희는 우리와 다른 장소에서 시험을 보게 됐다. 학원에서 단체 접수를 하는 날 결석해서 혼자 교육청에 직접 가서 접수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주변이 시끄러워서 신경 쓰일 거 같아.”
“그래도 잘 하잖아, 준이는.” 세희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나 배고파.”
“뭐라도 먹으러 가자. 고기 먹으러 갈까?”
세희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집에 있을 진아를 생각했다.
“좋지, 준이가 사는 거지? 대신 식당은 내가 결정할 거야.”
세희와 학원을 나와 청계 쪽으로 걷었다. 조금 가니 황학동 도깨비 시장이 나왔다. 전에 몇 번 들러서 오래된 LP를 몇 개 사기도 했던 곳이다. 6~70년대 풍경을 간직한 곳이 아직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게 신기했었다. 오랜 세월과 함께했던 이곳 분위기는 무겁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했지만.
도깨비 시장 뒷골목을 지나니 ‘마포집’이라고 쓰인 허름한 식당이 나타났다. 세희는 “여기야”라고 말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나이든 인부들과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 몇 명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아는 곳이야? 처음 와 본다.”
“학원 사람들하고 몇 번 왔었지. 홍균이 오빠가 가르쳐줬어. 갈매기살이 정말 맛있어.”
세희는 갈매기살 2인분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하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형하고 연락을 못 했네…. 형은 이번에 시험 볼까?”
“뭐야, 오빠랑 제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오빠랑 며칠 전에 통화했는데 이번 말고 내년에나 본대.”
“그렇구나….”
왠지 모를 미안함이 들었다.
잠시 뒤 붉은 선홍빛을 띤 고기와 소주, 짙은 향기가 나는 파무침 그리고 김치와 야채가 나왔다.
“아가씨 또 왔네. 옆에 있는 사람은 남자친구여? 처음 보는 얼굴인디.” 주인 할머니가 세희에게 아는 척했다.
“네, 남자친구예요. 깔깔깔.”
진아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인물 훤하니 공부 잘 하는 대학생 같구먼. 여자 많이 울리겄어, 아가씨도 조심허이.”
“그래 보여요? 공부만 하는 숙맥인걸요. 깔깔깔.”
“뭐야, 바보같이.”
민망해진 나는 세희를 쳐다봤다.
“자 이거이 맛있는 놈으로 골라 왔응께, 어서들 먹더라고.”
“맛있겠다. 영양 보충해서 내일 시험 잘 봐야지. 잘 먹을게, 준이야.”
“내일 시험을 위해서, 건배!”
“건배!”
고기를 먹고 밥에 된장찌개까지 먹고 소주 세 병을 더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왔다. 밤 9시가 넘었다.
“집에 갈 거야?”
“그만 가야지.”
“너, 집에 여자라도 숨겨 논 거야?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지난번에 내가 그랬다고 삐친 거지?”
소주 세 병에 취할 리 없는데 세희는 맘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런 거 아냐.”
“내일 시험이니까 오늘은 나랑 같이 있자. 준이네 가서 자도 되겠지?”
“나도 같이 있고 싶은데… 그러니까 거절하는 건 아니고… 편하게 자야 시험을 잘 볼 수 있으니까.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싫다는 거지?”
“그… 그게 아니고.”
“알았어, 됐어. 나 간다. 잘 가.”
“세희야….”
세희는 뒤도 안 돌아봤다. 이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뒤쫓았다.
“세희야, 잠깐만.”
“왜 그러는데? 나랑 같이 있기 싫다며?” 세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럼 뭔데?”
“일단, 내일 시험 잘 보라고 말하고 싶었고. 두 번째로 하고 싶은 말은 나도 같이 있고 싶다는 거야.”
“그런데?”
“내 방은 좀 그렇고… 세희네 집으로 가자고. 그러면 안 될까?”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진아가 기다리고 있는데. 하지만 이대로 세희를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알았어. 택시 타자.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진작 같이 가면 될 것 아니었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세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택시를 잡았다.
“마장동이요. 한양대 정문 건너편.”
세희가 앞자리에 앉았다. 혼자 뒷자리에 앉은 나는 말없이 있었다. 택시를 탄 지 20분이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세희는 택시비를 내고 아무 말 없이 걷기 시작했다. 뒤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편의점에 쑥 들어가더니 세희는 맥주와 마른안주 그리고 콘돔을 샀다. 계산하는 남자 알바생이 우리 둘을 흘끗 쳐다보았다.
“여기야.”
편의점을 나와 5분 정도 더 걷자 세희네 집에 도착했다. 3층짜리 단독주택의 반지하 방이었다. 주인집이 드나드는 현관과는 별도로 출입구가 있었다. 꽤 큰 방이었지만 깨끗하고 정리가 잘 돼 아담한 느낌을 줬다. 방 한쪽에는 영화 ‘글루미 선데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더블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옷으로 가득 찬 옷걸이, 작은 책상이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학원에서 수업 교재로 쓰는 책들과 성문 기초영어, 수학 정석 책이 놓여 있었다.
“늦었네. 그만 씻고 자자.”
외투를 벗고 화장을 지우고 갈아입을 옷을 챙기더니 세희가 먼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냥 바닥에 앉았다. 순간 마치 청량리에 온 듯한, 진아를 처음 만났을 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샤워를 마친 세희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커다란 셔츠와 팬티만을 입고 나왔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씻어.”
양말을 벗어 발을 씻고 간단하게 세수한 후 침대에 누웠다.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산 맥주와 콘돔은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잘 자.” 텔레비전을 끄면서 세희가 말했다.
“좋은 꿈 꾸고.”
“같이 있으니까 위안이 되네. 준이 내공이 오늘 밤 전수돼서 시험 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기운이 전달되길 바란다는 세희는 오히려 몸이 닿으면 안 된다는 듯 멀찍이 침대 한쪽으로 떨어져서 잠자리에 들었다. 손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진아를 생각하다가 나도 어느 틈엔가 잠이 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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