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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1화 "중독" (12) |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서도 그뿐 경마일만 되면 다시 경마에 매달렸다가 역시 무참히 패하고 마는 처절함을 미처 추스를 겨를도 없이 흘낏흘낏 아내의 눈치만 살피며 숨죽이고 있던 홍성만에게 어느 날 오수연이 선언이라도 하듯 내던진 말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홍성만은 그저 고개만 떨구었다.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해 쉴 새 없이 폭격을 해왔던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단호함에는 차분하고 정리된 듯한 기운이 엿보였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아내는 건너편 소파에 앉아서,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꺾고 쪼그려 앉아 있는 홍성만을 한참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홍성만은 진심으로 아내에 대한 미안함으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떤 비난과 경멸의 소리조차 감당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홍성만의 머리 속에 가득 찼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신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지고 있는 자리를 오늘 하루 경주의 잔상들이 흐릿하게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 잔상들은 마침내 파노라마처럼 뚜렷하게 홍성만의 머리 속에서 다시 펼쳐졌다. 게이트를 박차고 뛰쳐나오고, 자리다툼을 벌이고, 기수의 유도에 따라 코너를 돌고, 결승 주로에서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경주마의 모습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간과하고 있었던 변수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베팅을 했던 어리석음과, 신뢰하지 못하고 베팅 권에서 제외했던 경주마의 역주와, 코끝과 머리 차이의 승부에서 패한 아쉬움에 대한 미련들만이 가득 찼다. 순간 홍성만은 쉼 없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따금 자탄의 한숨이 새어나왔고 가벼운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경주에서의 낙마 사고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한순간 홍성만이 고개를 들었다. 아내가 그런 자신의 표정들을 관찰이라도 하듯이 하나도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비웃음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체념의 미소였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홍성만은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아내가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홍성만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의식만 하였을 뿐 차마 돌아보지는 못했다. 아내가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밖으로 나갔다. 다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홍성만은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내가 나갔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현관 쪽에서 휭 하니 찬바람이 밀려와 홍성만의 코끝을 때렸다. 홍성만의 코끝이 찡하고 울렸다. 까닭 모를 눈물 한 줄기가 주룩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홍성만은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흡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경마에 대한 중독 논쟁을 벌이고 있는 김달오와 조용철을 두고, 이제 겨우 1경주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아직은 유리벽 너머로 한가해 보이는 흡연실의 유리문을 밀치고 흡연실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결국 아내가 이혼을 선언했다. 홍성만은 설마 했지만 아내는 짐을 챙겨들고 나간 후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홍성만은 자책감과 속죄하는 심정만을 간직한 채 어느 누구에게도 아내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며칠 후, 홍성만은 어두컴컴한 현관문을 밀치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서 거실의 불을 켜는 순간 거실 안이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곳곳에 무엇인가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듯한 어수선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옷장을 열고 서랍장들을 열었다. 화장대 위와 서랍 속까지 하나씩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야 아내가 자신의 물건들을 모두 가지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홍성만은 천천히 거실로 다시 나왔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잠시 망연히 앉아 있다가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양주병 하나와 술잔을 집어 들었다. 잔에 가득 술을 채웠다. 그리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양주의 독특한 향을 느끼기도 전에 뱃속에서 창자를 씻어내기라도 하는 듯한 싸늘함이 퍼지더니 이내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길게 한 모금을 빨아 한참동안 머금은 채 있다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연기를 뱉어냈다. 순간 아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싸한 아픔으로 밀려들었다. 아니 앞으로는 아내가 집에만 없는 게 아니라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아내만 없는 게 아니라 자신의 주위에는 이제 아무도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마 때문에… 경마 때문에…?"
홍성만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다시 잔에 가득 술을 따라 단숨에 비우고는 깊이 담배를 빨았다. 아까보다 더한 싸늘함이 뱃속 가득 퍼졌다.
"경마를 택할 거예요? 나를 택할 거예요?"
아내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홍성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홍성만은 충혈이 된 채 퀭하니 움푹 들어간 눈동자를 깜박이며 아내가 떠난 현관문을 향해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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