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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1화 "중독" (13) |
며칠 후 아내가 떠난 현관문으로 더 많은 아내의 짐들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아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아파트를 처분해서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받아냈던 융자금을 상환하자는 전화만 왔었다. 홍성만은 거절 할 염치도 명분도 없었기에 부동산중개소에 아파트매도를 의뢰했다. 홍성만이 살았던 아파트는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선호도가 가장 높은 층이었기에 매물로 내놓자마자 매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에게 곧바로 팔렸다. 홍성만은 아파트를 처분한 돈 중에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 형 빌라의 보증금을 제외한 거의 전액을 아내의 통장으로 송금해주었다.
결국 아내와 아내의 짐이 빠져나간 현관문을 통하여 홍성만의 남겨진 가재도구들도 모두 빠져나갔다.
홍성만은 모든 가재도구와 소품들이 빠져나간 텅 빈 아파트 거실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내가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까닭에 집에서는 한번도 피워보지 못했던 담배였다. 어쩌다 지독히 흡연욕구를 느낀 날에는 아파트 복도를 서성이며 피우고 들어오거나 놀이터까지 걸어가서 벤치에 쪼그려 앉아 피우고 들어와야 했다. 지독히 추운 날이거나 억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다 이웃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그런 홍성만의 궁상스러운 모습을 보고는 씁쓸하고 어색한 미소들을 지으며 홍성만의 곁을 지나쳐갔다.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궁상을 떨면서까지 담배를 피우고 싶을까 하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홍성만은 그럴 때마다 집에서 여유로운 마음과 모습으로 담배를 피워보고 싶었다. 밤새워 강의문안을 작성하는 날이나 연구논문을 작성해야하는 날에는 더욱 그런 충동을 느껴 어떻게든 아내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아내는 집에서 절대로 담배를 피울 수도 없다고 단호히 잘랐다.
언젠가 아내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다가 TV의 금연 광고를 보고
"왜 담배의 좋은 점은 깡그리 무시한 채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흡연자들을 몰염치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폐인 취급을 하는지 몰라? 줄곧 담배를 피워왔던 흡연자들에게 담배가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안 좋다고 무조건 끊으라고만 할 일이 아니라 담배와 담배연기 속에 비타민이나 칼슘이나 좋은 영양소가 풍부하게 하여 오히려 다른 영양제나 보약처럼 권장기호품으로 만들 연구들은 왜 안 하는 거지? 별별 연구들은 다 하면서도 말이야?"
하고 아내가 약간은 동조를 해주기를 기대하며 생떼를 부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잖아? 담배가 그토록 안 좋은 거라면 마약처럼 제조나 유통단계에서부터 법으로 막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도 버젓이 나라에서 팔고 있잖아? 온갖 종류의 세금도 제일 많이 부과시키면서 말이야? 언젠가 지방강연을 갔었을 때 군청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관공서 화장실 벽에 붙어있는 문구였는데 출장을 가실 땐 꼭 저희 고장에서 담배를 사갑시다 하는 문구를 본적이 있어. 웃기지 않아?"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에서 경멸스런 눈빛으로 표정을 바꾸더니 이내 더 이상 홍성만의 궤변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실로 들어 가버렸다.
홍성만은 손가락에 걸쳐진 담배를 다시 빨아들이려다가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한참동안 저 혼자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담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내에게 몇 번이나 금연선언을 하고도 한번도 지켜내지 못한 담배였다. 홍성만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마치 마지막 남은 담배라도 되는 듯 깊이 담배를 빨았다. 그때 이삿짐을 옮기면서도 연신, 짐을 보니 사모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더러 있던데 사모님은 안 보이시네요? 하며 혹시 이혼하신 거냐? 혼자 사셨느냐? 하고 오지랖 넓게 관심을 보이던 이삿짐센터의 한 직원이 이제 출발해도 좋겠느냐는 듯이 입구에 서서 홍성만의 눈치를 살폈다. 홍성만이 깊게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직원은 흘낏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현관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망연히 열린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던 홍성만의 눈에 현관문이 경마장의 마권구매창구처럼 보였다. 꿈을 걸고 기대를 걸고 희망을 걸고 마권구매표와 함께 밀어 넣은 돈들을 그저 쏙쏙 빨아들이기만 할 뿐 다시는 토해내지 않던 마권구매창구처럼 저 현관문이 아내를 빨아들이고 가재도구들을 빨아들이고 다시는 되돌려주지 않을 커다란 구멍처럼 보였다. 이제 자신도 저 문을 통하여 불확실한 미래로 빨려나가게 될 것이다. 순간 홍성만은 깨달았다. 이런 초라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경마장의 마권구매창구를 떠 올릴 정도라면 자신은 확실히 경마에 중독이 되어 있다는 것을.
홍성만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고는 싱크대로 걸어가 수도꼭지를 틀어 불붙은 담배를 적셔 끄고 싱크대 곁에 놓아둔 대형쓰레기봉투 안에 꽁초를 버린 후 천천히 현관 밖으로 나왔다. 따갑고 강렬한 햇살들이 홍성만의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홍성만은 다시는 열고 들어갈 이유가 없게 된 아파트의 현관문을 닫고 키를 꽂았다. 이제 경비실로 내려가 경비에게 키를 건네주기만 하면 아내와 이년을 함께 했던 이 아파트와 작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홍성만은 다시 훅- 하고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내고 키를 돌렸다. 저 아래에서는 이제 혼자서만 살아가야 할 원룸 형 빌라로 싣고 갈 짐들을 실은 이삿짐센터의 운반트럭이 벌써부터 시동을 건 채 홍성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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