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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 VS 꾼 - 제1화 "중독" (7) |
홍성만은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김 아무개 경마 예상 전문가의 답 글이 올라주기를 기대하며 컴퓨터를 끄고 하루의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눕혔다. 아직 남아 있는 취기 탓도 있겠지만 피로감이 온몸에 퍼져 올랐다. 긴 장마 끝의 무더위가 방안을 습하게 하여 냉수 샤워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온몸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경마에 패한 날은 누구나가 그렇듯이 잠을 청해보려고 뒤척여도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하루 경마의 모든 경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다시 아쉬움과 후회와 분노의 기억들이 한데 뒤엉켜 괜스레 숨이 가빠졌다. 늘 그래왔겠지만 오늘의 경주들에서는 특히 코끝과 목차의 패배가 너무나 많았다.
조금만 더 승부를 해줬어도, 채찍질을 한번만 더해줬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텐데… 따라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짜고 하는 건가? 말도 기수도 어찌 그렇게 그럴 듯하게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그 어지러운 혼전 배당 경주에서도 기가 막히게 코끝과 목차로 고배당의 대끼리를 만들어내는 거 봐. 정말로 짜고 한다면 기가 막힌 연기들이다. 아냐, 짜고 할 수는 없어. 어떻게 그 많은 말과 기수들이 매 경주를 짜고 할 수 있겠어? 내가 믿었던 그 기수 놈이 나쁜 놈일 뿐이야. 뒤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추진 동작이나 채찍질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고삐만 밀고 있었어. 그래, 그런 놈한테 승부를 건 내가 잘못이었어.
홍성만은 신음 같은 한숨을 몰아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무슨 소린지 조차 구분해낼 수 없는 아우성들이 들려왔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주마들과 기수들이 경주로가 아닌 황량한 벌판에서 무리를 지어 서로 쫓고 쫓기며 몰려다니다가 서로 엇갈리고 휘돌고 솟구치고 하는 어지러운 모습들이 떠오르고, 경마장에서조차 들어보지 못한 말울음 소리와 말발굽 소리들이 한데 뒤엉켜 환청처럼 들려왔다.
홍성만은 환청으로 결국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고야 말았다. 담배를 찾았다. 컴퓨터에 앉아 줄담배를 피운 탓에 책상 위에는 구겨진 빈 갑만 놓여 있을 뿐 담배는 한 가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재떨이 속의 꽁초들을 뒤적여 보았지만 모두 필터까지 타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서랍을 뒤졌다. 며칠 전,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하고는 피우던 담배와 라이터를 서랍에 넣어두었을 텐데 보이지가 않았다.
참! 정말 끊겠다고 와락 구겨서 휴지통에 넣어버렸지. 가만, 휴지통을 청소하지 않았나? 휴지통을 뒤져보았다. 휴지통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래, 어제 청소를 하고 방과 주방과 욕실의 쓰레기통에 깔아 놓았던 검정 비닐봉투들을 몽땅 새것으로 바꿔놓고 쓰레기봉투에 담아버렸지.
홍성만은 현관문을 열고 입구 한곳에 놓아두었던 쓰레기봉투를 찾았다. 쓰레기봉투가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봉투가 가득 차 더 이상 담을 수가 없게 부풀어오르자 대문 밖으로 내다놨던 것을 기억해냈다. 파자마 바람으로 슬리퍼를 끌고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었다. 대문 밖에도 쓰레기봉투는 보이지 않았다. 참 부지런도 하네. 다른 때는 쓰레기봉투들이 터져 온 동네에 썩는 냄새가 진동할 때까지 며칠째 가져가지도 않더니….
홍성만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 참자. 그는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문을 닫고 냉장고를 열고 찬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참동안 멍한 시선으로 여기저기 살피다가 결국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대문을 나서서 가로등마저 깜박깜박 졸고 있는 어둑한 골목길을 올라가 슈퍼 골목으로 들어섰다.
비탈길에 비스듬히 서 있는 구멍가게는 대형 슈퍼들이 문을 닫는 한밤중까지도 가게문을 열고 있었다. 주인은 가게문을 열어 놓고 낡은 의자에 앉아 거의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자세로 고개를 꺾은 채 졸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깊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홍성만은 호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턱 낮은 카운터에 내려놓고 손만 뻗으면 집어낼 수 있는 진열대에서 담배를 집어 들고는 호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지만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더욱 강하게 끓어올랐다. 하는 수 없었다. 다시 천 원짜리 한 장을 더 꺼내놓고 일회용 라이터도 집어 들었다. 잔돈을 받기 위해서는 주인을 깨워야만 했다. 담배 비닐포장과 은박지를 뜯어내고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물고는 인기척을 내보았지만 주인은 반응이 없었다. 가스 분출구에 붙어 있는 라벨을 떼어내고 새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담배 연기가 온몸으로 퍼져 지친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길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벌써 수십 번을, 아니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끊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는데 이렇게 담배 맛에 도취해서야 영원히 담배를 못 끊게 될 것 같았다.
홍성만은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한두 살이 적었고 만 20살이 된 대학 3학년 때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런데 만 20세가 되던 성년의 날,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제방에 들어가 있는 그를 불러냈다. 홍성만은 아버지 곁에 앉았다.
"부르셨어요?"
아버지는 아주 맛좋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늦봄의 밤하늘에 길게 흩뿌리신 후 홍성만을 흘낏 한번 보시고는 담배 갑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더니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피워라."
홍성만은 눈이 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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