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지숙이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던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돌렸다. 종원이 어색한미소를 지어보이며 서 있었다. 지숙은 자기 앞에 서있는 종원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족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원 몇 명을 채용했다는 얘기를 해주며 경호원들과 신변을 노리려는 사람을 구분하려면 경호원들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기에 그들이 자신의 뒤를 은밀히 뒤따르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은근히 그들을 살폈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들 틈에서 종원을 보았었는데 며칠 지나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뿐이었다. 만약 종원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어쩌면 종원의 얼굴은 영원히 기억해내지 못하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숙이 흘낏 자신의 신변보호를 맡고 있다는 사내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들은 조금 더 떨어진 저만치에 서서 여유로운 표정들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지숙이 무슨 일이냐는 듯 종원을 바라보았다. 종원은 잠시 머뭇하더니 이내 넉살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숙과 함께 한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 중 하나가
"이상한 사람이네? 가자!"
하며 지숙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숙이 그 학생이 잡아끄는데 이끌려 몸을 돌리려는데
"앞으로..."
하고 종원이 소리를 높였다. 지숙이 멈칫했다.
"널 좋아할 거야. 너도 날 좋아하게 될 거고."
하고 종원이 말을 끝내자마자 학생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숙이 미간을 찌푸렸다. 종원은 아랑곳 않고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아무 때나 내가 원하면!"
하고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시 넉살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숙은 그런 종원을 흘낏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이내 돌아서서 흘낏흘낏 뒤돌아보며 뭐라고 떠들어 대는 학생들과 함께 교문을 빠져나갔다. 지숙의 신변보호를 맡았던 조직원들이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종원에게 다가오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제각기 다른 표정들로 미소를 지어보이거나 손짓을 해보이고는 이내 종원을 지나쳐 지숙의 뒤를 쫓았다. 종원은 저 혼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부터 종원은 지숙에게 말한 대로 김팔봉의 조직이 지숙뿐 아니라 그녀가족의 신변보호임무에서 손을 땐 이후에도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그런 특이한 관계는 이년 여 동안 지속 되었었는데, 꼭 종원의 집요함 때문이 아니더라도 종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에 종원이 하는 일이 결코 투명하거나 떳떳하게 내세울만한 일이 아닌 게 분명하다 할지라도 언제부턴가 지숙은 은근히 종원을 기다리게 되거나 종원에게 의지하려하거나 종원에게 허물어져 내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길고 지루한 오랜 시간동안의 침묵을 먼저 깨트린 것은 지숙이었다. 지숙이 망연히 어둠을 지켜보고 있는 종원에게 물었었다.
"널 알게 되었던 때."
종원이 나직이 대답했었다. 지숙은 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시선을 차창너머의 어둠으로 던졌었다.    
"정말 아주 멀리 떠나버리고 싶어."
지숙과 종원은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종원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종원이 혼잣말처럼 중얼 거리며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자 지숙은 다시 종원을 힐끗 보았었다. 종원은 의자 등받이를 뒤로 재끼고 몸을 뉘였었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지숙이 물었었다.
"모든 게 다."
종원이 지친 음성으로 나직이 대답했었다. 지숙은 망연히 종원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또 뭘 하고 다니는지도 안 물어?"
종원이 물었었다.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줄 거잖아?"
지숙이 되물었었다. 종원은 대답대신 눈을 감았었다.
"한숨 자! 좀 자고 나면 낳아질 거야."
지숙이 가늘고 하얀 손을 뻗어 종원의 감긴 눈을 살며시 덮었었다.
"내가 재워줄게."
지숙이 속삭이며 종원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깊은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종원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었다. 오랜만에 취해보는 달콤하고 깊은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