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원이, 자신과 이미 죽은 규태와 마동식이라는 형사가 함께 뒤얽힌 이번 사건에 대한 정황들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마동식과의 전화통화를 하기 전, 종원은 황량한 벌판 위에 세워 둔 차안에서 지숙과 함께 있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방법만 알아낼 수 있다면..."
종원이 혼잣말처럼 중얼 거리며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자 지숙은 종원을 힐끗 보았다. 종원은 의자 등받이를 뒤로 재끼고 몸을 뉘였다.
"뭐가 그렇게 힘들어?"
지숙이 물었다.
"모든 게 다."
종원이 지친 음성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지숙은 망연히 종원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또 뭘 하고 다니는지 또 안 물어?"
종원이 물었다.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줄 거잖아?"
지숙이 되물었다. 종원은 대답대신 눈을 감았다.
"한숨 자! 좀 자고 나면 낳아질 거야."
지숙이 가늘고 하얀 손을 뻗어 종원의 감긴 눈을 살며시 덮었다.
"내가 재워줄게."
지숙이 속삭이며 종원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깊은 입맞춤을 했다.
조직내에서 가장 절친했던 동료였으며 또한 선배이기도 했던 김규태가, 조직생활청산과 자신의 애인인 조영숙과 함께 해외로의 도피를 결심하고 마동식이라는 형사와 접촉을 하여 그에게 자신의 신분위조와 해외도피처를 제공해 줄 것을 조건으로 한 밀약에 따른 거래를 한 후, 조직으로부터 임무지시를 받은 밀수거래에 관한 정보들을 사전에 그에게 제보해주어 경찰들이 밀수거래현장을 급습하게 했을 뿐 아니라 거래에 사용되었던 거액마저 그에게 건네주었지만, 결국 김규태는 마동식의 배신으로 마동식과의 거래에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뿐만 아니라 상대조직으로부터 살해의 위협에 쫓겨 서울 외각의 한 여인숙에서 은신중이다가 애인인 조영숙의 뒤를 미행한 상대조직원인 박만규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까지도 조직과 상대조직의 표적이 되고 있다. 종원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려든 이번 사건이 시작되었던 때부터를 기억해내기 시작했다.
"넌 언제나 네가 하는 일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얘기하더라?"
규태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래! 난 영화의 주인공처럼 살아갈 거야. 케리쿠퍼, 크락크케이블, 험프리보가트, 버트랑카스타, 커크다그라스, 그레고리펙, 찰톤훼스톤, 마론브란도, 몽고메리크리프트, 제임스딘, 폴뉴만, 아랑드롱, 쟝폴벨몽드, 로버트드니로, 알파치노, 더스틴호프만, 실베스타스텔론, 이소룡, 성룡, 이연걸, 주윤발..." 하고 종원이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눈을 감은 채 외국영화배우들을 읊조리자
"허리우드에 가보고 싶지 않아?"
하고 규태가 물었었다.
"가보고 싶지."
종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하자
"라스베가스도?"
하고 규태가 물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하고 종원이 잔뜩 기대감 부푼 표정으로 히죽 웃어보이자
"비행기나 타봤어?"
하고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던 규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아직... 언젠간 꼭 탈거야."
하고 종원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때
"그래. 비행기 타고 가보자... 하와이, 마우이, 오하우, 호주, 쿠알라, 싱가폴,마닐라..."
하며 마치 종원이 외국영화배우들을 읇조리 듯이 외국지명을 열거해보이던 규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난 유럽 쪽이 더 좋아. 파리, 모나코, 로마, 암스테르담, 하이델베르그, 도버, 런던, 마르세이유... 그리고 스위스... 그래. 알프스!"
하고 종원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었다. 그런 종원을 흘낏 보던 규태가 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난 간다."
했었다. 그때 알아냈어야 했다. 아니 최소한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어야 했다. 그랬다면 더 이상 규태와 마동식과의 밀약과 거래가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종원은 생각했다.